밤 사이 비가 거세게 내리는가 싶더니 아침 햇살이 강렬하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여행에선 주로 밤에만 비가 온다.)
커튼을 열자 파란 하늘과 흰구름이 시원해 보인다.
"아, 날씨 끝내준다."
햇볕 아래 서 있어도 덥지 않을 것 같다.
저이는 어찌 저리 환할까 기웃거리다가, 드디어 비결을 찾았어요. 날마다 맑은 햇살 푸지게 담아 드시더군요. 설거지한 그릇 널어 바짝 말리고는, 마당에 그득히 쏟아지는 햇살 듬뿍듬뿍 받는 거예요.
햅쌀보다 맛나고 다디단 햇살들을요.
- 정우영, 「햇살밥」 중에서 -






배를 타고 따 띠엔(Tha Tien)에 가서 간단한 간식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강물과 왓아룬을 바라보며 빈둥거릴 작정으로 표를 끊는데 직원이 오늘은 배가 '라지니(Rajinee)'까지만 간다고 한다.
"라스트보트 라지니, 라스트보트 라지니"라는 말을 반복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휴대폰에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을 보여주었다.
'오늘은 왕실 행사 연습이 있어 오후 2시 반 이후에는 배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짜오프라야 강에 그리 많이 다니던 관광용 보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류 쪽으로 강을 건너 다니는 배는 다니지만 상류 쪽으로는 완전히 봉쇄된 듯했다. 최근 태국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뉴스에 더러 나오지만 아직까지 태국에서 왕실의 영향력은 탄탄해 보였다.


예상치 않게 한 정거장 전인 라지니 선착장에서 내려 걷다 보니 시암박물관이 나왔다.
경제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인데 박물관이 제격인 것 같다. 외관이 단정했다.
태국의 역사와 종교, 건축, 음식, 축제 옷, 학교, 복권, 무에타이 등 생활문화를 무거운 학문적 분위기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둘러볼 수 있도록 만든 곳인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관람이라기보다는 산책을 하듯 가볍게 박물관 안을 걸었다. 매표소에서 경로우대로 입장료(100밧)도 받지 않아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본전(?) 부담도 없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메이크 미 망고"라는 카페로 망고를 먹으러 갔으나 사람들이 많았다.
바로 포기를 하고 되돌아나와 근처에 있는 카페 위위 (Vivi Coffee Place)로 갔는데, '새옹지마'라더니 그곳에서 생각지 않게 강에서 벌어지는 왕실 행사를 볼 수 있었다.


옆에서 그 광경을 함께 보던 태국인이 나와 아내에게 '(이런 행사를 직관하는 건) 대단한 행운'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연습이 무슨 행사를 위한 것이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설명하는데 이해하기 힘들었다.
카페 여직원은 자신의 영어론 설명하기 어렵다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올해가 '빅부다(Big Buddha) 해'라 행운이 가득한 해여서 왕실에 축복을 기원하는 행사라고 설명했다(하는 것 같았다). 하루가 지난 뒤 생각이 나서 다시 호텔 직원에게 물어보니 오히려 그는 '그런 행사가 있었냐?'고 되물었다.
행사의 목적과 내용은이해랄 수 없었어도 방콕 사람들과 여행객들의 주요 교통로 중 하나인 짜오쁘라야 강을 전면통제하는 일 자체가 이색적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수십 차례 방콕을 찾았지만 처음 보는 일이었다.
저녁은 사톤(Sathon) 지역에 있는 식당 "반 솜땀(Baan Somtum, 솜땀의 집)"에서 했다.
잘 알려진 식당인 데다가 지상철 쑤라싹 역에서 가까워서 선택했다.
아내와 나는 맛집을 일부러 찾아가기보단 숙소 주변이나 여행 일정을 보내는 곳에서 가까운, 그것도 접근이 용이한 곳에서 식사를 한다. 시간이 많은 장기 체류자와 단기여행자는 식당 선택 기준도 다를 수밖에 없다. '현지인들은 이런 델 가요' 하는 식의 이른바 숨은 맛집 정보를 아내와 나는 우리의 위치와 가까운 곳일 때만 받아들인다.
그리고 '구글신'은 방콕에 어디서든 가까운 곳에 맛있는 식당이 산재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 곳은 사람이 많이 몰려 자리잡기가 힘들 수 있다는 단점은 있지만.

다행히 반솜땀에는 자리가 있었다. 우리가 앉자마자 곧 만석이 되었다.

솜땀은 특유의 맵고 신 맛으로 한국인에게 여행 중 김치 생각을 덜어주는 음식이다.
기본적인 솜땀은 아래 사진에서 보듯 생선소스, 라임 고추, 땅콩 등을 작은 절구에 넣고 빻은 소스를 채를 썬 파파야와 마른 새우와 함께 무쳐 먹는 것이다. 맵고 시고 달달한 맛이 난다.
이외에 게를 넣으면 '솜땀 뿌', 파파야 대신 설익은 망고를 넣은 '땀 마무앙', 오이를 넣으면 '땀 땡' 등으로 부른다. 원래부터 있는 것인지 근래에 진화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긴 퓨전의 세상에 오리지널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솜땀의 시그니쳐 메뉴 중의 하나인 옥수수 솜땀도 '족보'가 있는지 새로 탄생한 것인지 모르겠다. 텔레비전 방송에서 보고 한번 먹어보고 싶던 음식이었다. 소스는 기존의 솜땀과 같은 듯했지만 옥수수와 땅콩이 씹히는 식감과 맛과 어울려 '솜땀인 듯 솜땀 아닌 솜땀 같은' 맛을 냈다. 맛있었다는 말이다.

얌운센은 투명한 당면에 새우와 양파 등을 넣고 솜땀 비슷한 소스와 버무린 음식이다.
아내와 나에겐 솜땀과 함께 반드시 태국에서 먹어야 할 음식이다.
미국이나 한국에선 에서 다른 음식은 잘 만드는 태국식당에서도 이것만큼은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생선마늘튀김,
손자저하들이 먹어도 좋겠다고 아내와 이야기했다.
사실 지난번 태국 여행에서도 저하들과 먹었던 음식이다.
물론 저하들은 달달한 망고찰밥과 볶음밥을 더 좋아했지만.

후식으로 먹은 롱안 쥬스. 호텔 직원은 '롱껭', 태국말로는 람야이라고 한다고 했다.
어느 게 맞는지 정확한 건 모르겠다.
아내와 나는 람부탄이나 망고스틴 보다 점점 더 좋아하게 된 과일이다.
아침 식사 때마다 한 접시씩 가져다 까먹었다.
(비슷한 과일로 롱콩(Longkong) 혹은 랑삿(Lanhsat)도 있다. 나로서는 헷갈린다.)


아침의 맑은 기운이 저녁까지 이어진 듯 막힘없이 상쾌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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