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애국'이란 단어를 막연히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가치나 사랑 같은 거라고 상상했다.
일테면 반공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적군 탱크를 향해서 맨몸으로 돌진하는 육탄 용사의 용기나 적이 던진 수류탄을 끌어안고 산화하여 아군을 보호하는 희생처럼 거룩하거나 거대한 어떤 것.
일상에서 '애국적' 감정이라고 내가 느꼈던 것은 킹스컵이나 메르데카 축구대회의 라디오 중계 때 '가슴에 태극 마크도 선명한 우리 선수들 어쩌고저쩌고' 하는 멘트를 들을 때뿐이었다.
조금 더 커서 근로, 납세, 국방, 교육이라는 국민의 4대 의무를 배울 때는 애국도 들어가 5대 의무로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같다.
애국.
나라사랑.
좋은 말이다. 누가 거기에 반대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나는 '애국'과 '국가'를 특별히 강조하는 사람들을 주의해서 바라보곤 한다.
그들은 종종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아름다운 당위의 말을 전면에 내세우곤 하기 때문이다.
줄기세포공학의 대가라는 황** 박사 소동 때나 우리나라 어떤 지역에 이른바 '세계 7대 자연경관'이라는 허상의 타이틀을 씌울 때도 애국과 국가는 다른 질문과 생각을 압도했다.

'그 X'에 대한 탄핵 심판에서 국회 측 대리인은 '말은 언어공동체의 소통수단이자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정의하며, '따라서 말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잘 담아내지 못하고, 정반대로 사용된다면 소통은 불가능하며' 이렇게 되면 언어공동체의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X'은 ' 헌법이 보장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면서 헌법수호를 말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언동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헌법 수호를 말하며 아름다운 헌법의 말, 헌법의 풍경을 오염시켰다'는 것이었다.
국민을 대상으로 '그 X'이 꺼낸 '계몽'이란 단어도 그렇다. 한 마디로 망언이다.
'계몽'이란 말은 국민을 우매시 하는 그의 터무니없는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3개월 동안 우리는 정작 '계몽'의 대상이 그 자신과 망언을 증폭시키는 주변 무리들에게 한정됨을 잘 듣고 보지 않았던가.
모든 이념과 논리에 앞서는 것은 진실이다.
진실을 담지 않은 그 어떤 '거룩한' 단어나 말은 단지 선전이나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태극기 또한 그렇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한 상징물이 아니라 특정 계층과 정파의 전유물이 되다시피하여 한동안 심정적으로 가까이 다가서기가 꺼림칙할 정도로 왜곡되었다. 그 때문에 이번 삼일절 집회에 태극기를 들고 나오자는 주장과 행동은 정당한 '감정 회복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산골 운동장에 태극기 나부끼고
늦도록 아이들 너덧이 남아
엎치락뒤치락 영락없는 축구를 하고 있다
우리 저맘때도 그랬지
어스름토록 태극기 나부꼈지
커서 보니 아파트 높은
암벽에 태극기 하나 매달려 있다
친구도 없이 혼자 베란다 밖에 나와 손을 흔드는
그 아스라함이 너무 위태롭고 씁쓸하다
다들 어디 갔을까
암벽을 흐르는 독백이 너무 차다
- 박후식, 「풍경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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