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날씨가 궂을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오후에는 강수 확률 100%라는 걸 알면서도 우산을 안 가지고 산책을 나갔다. 우산 쓰기 싫어하는 건 나의 좋지 않은 오래된 버릇이다.
날씨는 흐렸지만 기온은 푸근했다. 얼음이 다 풀린 호수에는 오리들이 경쾌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호수 둘레길을 걷고 나와 도서관으로 갔다. 책을 읽다가 토닥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내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비가 많이 온다며 우산을 들고 도서관으로 오겠다고 했다. 장대비가 아니면 비 맞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라 처음엔 그러지 말라고 하다가 중간 지점에서 아내와 만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도서관 밖으로 나오니 안에서 보던 것보다 빗줄기가 제법 거셌다.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 나희덕, 「비 오는 날에」-
봄비 덕에 해보는 짧은 빗속 데이트? 여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세상엔 좋은 걸 시기하는 요정(?)이 있어 심술을 부린다. 그들은 늘 예측불가의 방향에서 느닷없는 돌풍을 만들어 부부간의 오붓한 분위기를 휘저어 놓곤 한다.
비를 맞으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맞은편 길에서 나를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쪽으로 왔어? 내가 이쪽 길로 오라고 했잖아. 카톡 안 봤어?" 나는 아내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가며 불만투로 말을 건넸다. "이 길이 더 가까울 것 같아서. 전화를 했는데 당신이 안 받더라구." "안 받으면 원래대로 왔어야지." "그래서 내가 당신을 발견하고 불렀잖아. 근데 왜 짜증을 내?"
잠시 티격태격이 이어지던 끝에 아내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겁나는 일 중의 하나가 아내의 침묵이다. 화가 난 말이라도 주고받으면 괜찮은데 말을 안 하면 견디기 힘들다. 그때부터 '전투'의 주도권은 급격하게 아내 쪽으로 기운다. 5분 다투고 10분 사과하는 나의 비효율이 시작되는 것이다.
10분쯤 침묵으로 걸어 집으로 온 뒤에 아내가 말을 꺼냈다. 화가 누그러졌다는 신호다. "어제부터 이상하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다투네." 간밤에도 지하철입구를 찾는 문제로 실랑이를 했다. 내가 말했다. "어제오늘뿐만이 아니고 우리가 함께 산 40년 동안 모든 다툼이 다 사소한 거였어." 아내가 실소를 했다. "어이구, 그걸 잘 아는 사람이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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