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축구 예선. 약체 오만과 졸전 끝에 비겼다. 축구광인 나로서는 예전 같으면 흥분을 했을 것이다. 남은 경기의 경우의 수를 따져보며 육두문자를 쓰다가 아내의 눈총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무덤덤했다. 그게 뭐 대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내란 상황이 지속되면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마 그럴 거 같다.
축구경기를 보는 동안에도 경기에 온전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치 어릴 적 숙제 안 한 채로 등교할 때나 공부 안 하고 기말고사 보러 가는 것처럼뭔가 중요한 일을 빼먹거나 미루고 있다는 찌뿌둥한 감정이 앙금처럼 깔려 있었다.
이제까지 여행, 손자, 책, 영화, 음식, 산책 등의 일상을 허접한 솜씨로 채워온 이 블로그도 그렇다. 지난 100여 일 동안은 내가 감당하지 못하고 살아온, 민주니 계엄이니 내란이니 탄핵이니 하는 거대한 가치나 의미를 담은 단어들을 자주 올리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일상이었다.
*경향신문 김용민화백 만평
엇그제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은 노인이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나에게 가까운 쪽 손으로 핸드폰을 든 데다 화면의 활자를 크게 설정해 둔 탓에 그가 보는 내용이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한강의 기적······ 박정희대통령······ 2년 반동안 세계의 곳곳을 누빈 윤** 대통령······ 종북 좌파의 망동······ 탄핵 분쇄······ 등등이 보였다.
나중엔 호기심에 일부러 보았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장관이 쓴 호소문이었다. '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계엄으로 최초의 전사가 되었으니 우리 모두는 최후의 전사가 되자'는 주장 끝에 이 글을 최소 30명의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자는 추신이 덧붙여 있었다. 노인은 학창 시절 책상 속에 들어 있던 '행운의편지'를 다시 써서 보내 듯 카톡으로 공유를 시작했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인가? 늘 그렇지는 않고 누구나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다만 선량한 대다수의 의지가 역사 속에 이성적·합리적으로관철되어 왔을 뿐이다.
국가라는 말이 무겁고 멀었는데 저들이 국가를 파탄내자 내 가족과 삶이 떨고 있다
살림을 망치고 경제를 망치고 일상과 안녕과 미래를 망치는 너희는 용서받지 못할 가정파괴범
국가 일은 멀고 집안 일은 가깝다지만 나라의 존엄이 짓밟히고 더럽혀지자 세계 앞에 내 얼굴을 들기도 어려워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바로잡지 않고는 내 인생도 가정도 살아갈 날들도 위태로워서 사는 맛과 깊은 잠과 기쁨도 꽃피기 어려워서
보라, 이 춥고 사나운 날에도 거룩한 분노와 애타는 사랑으로 우리 함께 나 여기 서 있으니 (···)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너희가 망치고 불 지른 나라 우리가 살리고 빛내고 말 테니
- 박노해, 「여긴 내 나라니까」-
오늘 오후 경복궁 앞에서 '그 X' 파면을 촉구하는 "제16차 범시민대행진"이 있다. 미안하게도 오늘 나는 손자저하가 옮겨 준(걸로 추정되는) 감기로 현장에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유튜브로만 응원을 할 생각이다. 이 글을 보신 분들 중에 나처럼 손자저하의 '은총'을 받지 못한 분들이 대신 참석해 주시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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