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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여긴 내 나라니까

by 장돌뱅이. 2025. 3. 21.

월드컵 축구 예선. 약체 오만과 졸전 끝에 비겼다.
축구광인 나로서는 예전 같으면 흥분을 했을 것이다.
남은 경기의 경우의 수를 따져보며 육두문자를 쓰다가 아내의 눈총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무덤덤했다. 그게 뭐 대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내란 상황이 지속되면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마 그럴 거 같다.

축구경기를 보는 동안에도 경기에 온전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치
어릴 적 숙제 안 한 채로 등교할 때나 공부 안 하고 기말고사 보러 가는 것처럼 뭔가 중요한 일을 빼먹거나 미루고 있다는 찌뿌둥한 감정이 앙금처럼 깔려 있었다.

이제까지 여행, 손자, 책, 영화, 음식, 산책 등의 일상을 허접한 솜씨로 채워온 이 블로그도 그렇다.
지난 100여 일 동안은 내가 감당하지 못하고 살아온, 민주니 계엄이니 내란이니 탄핵이니 하는 거대한 가치나 의미를 담은 단어들을 자주 올리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일상이었다.

*경향신문 김용민화백 만평

엇그제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은 노인이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나에게 가까운 쪽 손으로 핸드폰을 든 데다 화면의 활자를 크게 설정해 둔 탓에 그가 보는 내용이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 한강의 기적······ 박정희대통령······ 2년 반동안 세계의 곳곳을 누빈 윤** 대통령······ 종북 좌파의 망동······ 탄핵 분쇄······ 등등이 보였다.

나중엔 호기심에 일부러 보았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장관이 쓴 호소문이었다.
'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계엄으로 최초의 전사가 되었으니 우리 모두는 최후의 전사가 되자'는 주장 끝에 이 글을 최소 30명의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자는 추신이 덧붙여 있었다.
노인은 학창 시절 책상 속에 들어 있던 '행운의편지'를 다시 써서 보내 듯 카톡으로 공유를 시작했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인가?
늘 그렇지는 않고 누구나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다만 선량한 대다수의 의지가 역사 속에 이성적·
합리적으로 관철되어 왔을 뿐이다.

국가라는 말이 무겁고 멀었는데
저들이 국가를 파탄내자
내 가족과 삶이 떨고 있다

살림을 망치고 경제를 망치고
일상과 안녕과 미래를 망치는
너희는 용서받지 못할 가정파괴범

국가 일은 멀고 집안 일은 가깝다지만
나라의 존엄이 짓밟히고 더럽혀지자
세계 앞에 내 얼굴을 들기도 어려워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바로잡지 않고는
내 인생도 가정도 살아갈 날들도 위태로워서
사는 맛과 깊은 잠과 기쁨도 꽃피기 어려워서

보라, 이 춥고 사나운 날에도
거룩한 분노와 애타는 사랑으로
우리 함께 나 여기 서 있으니
(···)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너희가 망치고 불 지른 나라
우리가 살리고 빛내고 말 테니

- 박노해, 「여긴 내 나라니까」-

오늘 오후 경복궁 앞에서 '그 X' 파면을 촉구하는 "제16차 범시민대행진"이 있다.
미안하게도 오늘 나는 손자저하가 옮겨 준(걸로 추정되는) 감기로 현장에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유튜브로만 응원을 할 생각이다.
이 글을 보신 분들 중에 나처럼 손자저하의 '은총'을 받지 못한 분들이 대신 참석해 주시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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