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았다.
길이 여전히 막혀 있을 경우 먼 거리를 돌아나가야 하므로 출발을 조금 서두르기로 했다.
날씨는 희망처럼 푸른 하늘이 보이는 듯 하다가 다시 구름으로 감추어지길 반복했다.
땅은 말라 있었지만 그런 하늘의 상태로는 오늘의 일기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숙소가 있는 그랜드 레이크에서 멀지 앟은 곳에 로키마운틴 국립공원 출입구가 있었다.
해발2천6백미터에 있는 출입구였다. 출발점인 그랜드 레이크는 2,550미터였다.
혹시나 문을 닫았을까 자못 긴장을 하며 다가더니 다행이 통제한다는 입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매표소의 늙은 할아버지 관리인이 경쾌한 인사로 맞아준다.
"문 열린 거 맞죠?"
"그럼 오늘은 활짝 열렸수다."
"산 위에도 날씨가 좋다는 뜻입니까?"
"그러길 바라겠소."
하긴 어느 구름에 비가 들었는지 하늘의 조화를 누가 알겠는가.
불안한 마음을 말로라도 위로 받자는 것일뿐.
고도를 높여갈수록 날은 다시 어두워갔다. 그나마 조금씩 보이던 푸른 하늘도 사라지고
탁한 우유 같은 구름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눈이 덮힌 산 봉우리들이 구름 속에 드러났다
사라지곤 했다.
"이러다 산 위에서 구름만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바라던 길이 열리자 걱정이라기보다는 다른 욕심이 생겨난다.
언젠가 산행 중에 안개에 갇힌 경험이 있다.
자주 다니던 곳이라 산길을 눈에 훤하게 그릴 수 있는데도 워낙에 짙은
안개라 능선에서 길은커녕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저 짙은 농도의 구름이 능선까지 뻗쳐있다면 굽이치는 산줄기나
깊은 계곡을 조망하기는 애시당초 그른 일이지 싶었다.
우유 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을 뿐이리라.
"만약에 그렇다면 오늘은 예고편으로 치고 어제 계획 했던대로
며칠 뒤에 다시 와야지 뭐."
아내에게 말을 했지만 사실 내게 하는 다짐이었다.
트레일릿지로드 TRAIL RIDGE ROAD 는 로키산의 동서를 넘는 길이다.
도로 상의 가장 높은 지점이 3,713미터이고 11,000피트(3천4백미터) 이상 되는 길만도
자그마치 11마일이나 이어지는 'HIGH WAY'이다. 눈이 많다보니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말까지 일년에 반 이상은 닫혀 있는 길이기도 하다.
빽빽한 나무숲와 구름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던 도로는 정상부에 가까워오며 시원스레 시야를
틔워 주었다. 회색 구름은 여전히 하늘을 덥고 있었지만 동쪽 하늘이 밝아서 안심이 되었다.
해발3,595미터에 있는 ALPINE 비지터센터에 오르자 비로소 로키산의 동쪽 사면을 볼 수 있었고
푸른 하늘과 햇살을 만날 수 있었다. 눈 덮인 산맥의 풍경은 호쾌했다. 바람이 불고 추웠지만
그런 풍경 때문에 묵묵히 견딜만 했다.
위 사진은 GORE RANGE에서 본 로키산의 서쪽 풍경이다.
전망대 주변에서 고산지대에 사는 다람쥐과의 동물 마멋 MARMOT을 보았다.
8달이라는 긴 동면의 시간 동안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름 막바지에는 체중을
2배씩이나 불린다는 동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동통통 살이 올라 있었다.
아내와 나는 이제까지 MARMOT이 캠핑 장비류의 상표인 줄만 알고 있었다.
아내의 침낭에 MARMOT이라는 상표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옆에서 아이들과 함께 이 동물을 관찰하던 사람에게서 비로소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마멋이 놀랠까 봐 목소리도 낮추어 속삭이듯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관계의 진전을 의미한다.
우리는 앞으로 캠핑에서 침낭을 꺼낼 때마다 로키에서 만난 마멋을 떠올릴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자동차로만 로키산을 넘는 것은 싱거운 일이 될 터였다.
우리는 짧은 트레일을 걷기로 했다. ROCK CUT이라는 주차공간에 차를 세우고
TUNDRA COMMUNITIES TRAIL을 걸었다.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길이었다.
길을 오르며 아내와 나는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느낌을 경험했다.
무언가 가슴을 은근하게 누르는 듯하면서 가끔씩 어질어질한 느낌.
급격한 경사길이 아님에도 평소보다 숨이 더 찼다. 말로만 듣던 고산증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체험한 가장 높은 고도는 발리 아궁산의 3,142미터이다.
그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4천미터에 가깝게 오르자 신호가 나타난 것 같았다.
본격적인 증세가 나타날만한 고도가 아니어서인지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트레일은 왕복 한시간의 거리였다. 눈 덮힌 봉우리들을 보며 걷느라 힘이 들지 않았다.
길가 표지석에 우리가 수목상한선을 지나 툰드라지대로 들어간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툰드라 지대는 연중 대부분이 영하의 기온이고 더운 여름에도 10도를 넘지 않아
이끼류 이외의 식물은 생존이 불가한 지대라고 한다.
YOU AR ENTERING A SPECIAL WORLD. LIFE HERE IS STRAINED
BY SCOURING WINDS AND BITTER COLD, AND ONLY THE HARDIEST SURVIVE.
산 동쪽 아래로 내려오자 내려오자 날은 포근했다.
초가을의 기온이라 바람도 끝이 무뎌져 부드러웠다.
우리는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BEAR LAKE 주변으로 가서
다시 한번 더 짧은 트레일을 걷기로 했다.
베어레이크로 가는 길에 앞서 가는 차가 갑자기 멈추어 무슨 일인가 했더니
노루(?) 가족이 도로를 횡단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사람들의 기다림을 의식하지 않고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길을 건너 언덕으로 올라갔다. 당당한 발걸음이 마치
이곳은 자신들이 주인이라고 과시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NYMPH LAKE를 거쳐 DREAM LAKE까지 걸어갔다 되돌아 내려왔다.
왕복 5키로미터의 거리였다. 조금 더 먼 EMERALD LAKE까지 생각을 했지만
아내가 지쳐보였다. 아내의 체력으로 고개마루에서 툰드라 트레일까지
걸었으니 이미 정량을 넘어 섰다고 보아야 했다.
로키산의 동쪽 관문인 ESTES PARK의 BEAVER MEADOWS 비지터 센터가 로키산의
마지막 일정이 되었다. 애시당초 1박2일로는 다녀갔다고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설사 한두 곳의 트레일을 더 걸었다고 해서 채울 수 있는 만족감이 커질 수 없었고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덴버로 향해 출발하기 위해 차의 시동을 걸기 전 별탈 없이 산을 넘어준
아내가 기특하단 생각에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아내는 놀라서 볼에 손을 댄 채 뭐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메리카니까! 장돌뱅이도 아메리칸스타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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