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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바람 부는 제주2 (끝)

by 장돌뱅이. 2013. 3. 28.

강정마을
 

 

 

강정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마을 곳곳에 붙여지고 세워진 현수막과 깃발의
글귀들이 알려주고 있다. 며칠의 휴가를 이곳에 찾아가 기도를 하는데 써버린,
그래서 먹고 놀다만 온 우리의 제주여행을 부끄럽게 한 분을 알고 있다.
마을 주민이 아닌 사람은 나가라는 말에 주민등록지를 아예 그곳으로 옮긴 신부님도
있다고 한다. 주민들이 마을 일에 가장 일차적인 당사자이긴 하지만 꼭 강정마을에 살지
않아도 내가 사는 국토의 한 부분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나를 누구의 국토라 말하지 마라
   어느 누구의 배타적 영토라 말하지 마라
   그들은 그 국토 안에서 다시 수많은 국토와
   수많은 정부를 두어 생명을 분리하고 분열시켰다
   나는 그 죽음의 이름을 떠나 푸른 파도 가운데 있으리라

   국토는 일찍이 오직 내가 푸르다는 이유만으로 변방으로 내쫓았고
   지배를 거부한다 하여 나를 내 땅에서 배제하더니
   이제 다만 나의 노동력과 나의 자원을 욕망하여
   나를 사랑하는 국토라 부르고
   나에게 애국을 강요하고
   온갖 욕망을 미끼로 점령하려 들지만
   국토든 식민지든 나를 만신창이로 수탈할 목적뿐이므로
   나는 그 높고 위대한 이름으로부터
   절해의 고도를 향해 탈주하련다
   모든 수탈과 침략으로부터 고립무원을 향해
   오직 푸르름으로 나를 절연하련다
               
-백무산의 시, "생명의 이름으로" 중에서 -


추사 김정희가 유배 살던 곳


추사 김정희를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글씨와 그림에서, 고증학에서,
금석학에서 그의 업적은 빛난다. 유배라는 힘든 상황에서 그는 삶과  예술을 돌아보고 가
다듬어 추사체로 일컬어지는 자신만의 글씨를 완성하였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라는 논어에 나오는 글귀를 화제로 삼아 유명한
“세한도”를 그려내기도 했다.

작지만 깔끔한 기념관과 복원된 그의 옛집을 돌아보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학자의
삶과 그가 이룬 것을 되짚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제주 전통 방식의 집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제주도에는 조선시대에, 특히 후기에 이르러 2백 명 이상의 유배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중앙 정치의 부산물인 그들의 기약 없는 유배 세월을 먹이고 거두는 일도 결국 제주 백성들의
몫이었다.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기간은 9년이었다. 그의 빛나는 예술적 성취와는 상관없이 
그의 육체적 생존은 누군가의 고난스런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게 뭐 별 거냐고 하면 특별히 할 말은 없고, 또 별 쓰임새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세상의 주목을
받는 크고 위대한 것들의 이면에 있는 여리고 작은 것들을 잠시 생각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송악산과 산방산

송악산 걸어 오르려던 계획은 비바람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대신에 산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가 산 주변의 바닷가를 잠시 거닐었다. 바닷가 절벽에 동굴이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이 제주사람들을 동원하여 뚫은 것이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는 1945년 일본은 미국과 결전을 대비하여 제주도 주둔 병력을 크게
늘였다. 그리고 100여 개의 요새와 비행장을 제주도 곳곳에 만들었다.
국토는 합부로 파헤쳐지고 사람들은 강도 높은 노동을 강요 받았다.
빼앗긴 나라에선 국토도 사람도 온전할 수가 없다.
 

 

바다 건너 북쪽으로 중절모 모양의 산방산이 보였다.
날이 맑았다면 파란 바다와 어우러진 선경(仙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산방산 근처의 귤 농장에서 귤을 샀다. 농장 주인은 아직 철이 일러 단맛이 덜 하다고
미리 알려주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울 집에도 택배로 부치고 숙소로도 가지고 와 얼굴을
찌푸려가며 신맛을 즐겼다. 어렸던 60년 대 귤은 대단히 귀한 과일이었다.
사람들은 ‘미깡’이라는 일본말로 부르며 귀하게 대접했다. 껍질까지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차로 끓여먹었다. 그보다 먼 조선시대 제주도의 귤은 중앙 정부의 철저한 감독 품목이었다.
감귤나무에 열매가 맺히면 하나하나에 꼬리표를 달아두고, 없어지거나 손상이 되면 소유자를
처벌했다. 이 때문에 제주사람들은 감귤 농사를 지으려고 하지 않았을뿐더러 이미 있는
나무들도 몰래 고사 시키려고 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제는 자랑거리가 된 이른바 ‘진상품’이란
옛날엔 대부분 이와 같이 무수한 백성들의 고통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항파두리성

항파두리성은(抗巴豆里城)은 제주말로 철옹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은 몽고의 침략에 맞서 고려가 벌여온 40여 년의 항쟁이 마감을 한 곳이다.
강화로 천도하며 맞서던 고려왕조가 굴욕적인 환도를 한 후 특수부대였던 삼별초는
전라도의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장소를 옮겨 성을 쌓으며 항몽 의지를 다진다.

항파두리성은 둘레가 6킬로미터에 이르는 토성이었다. 높이 4-5미터로 그리 높아보이지
않지만 그 위에 서면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13,000명의 병력을 끌고 온 고려
정부와 몽고의 연합군을 700명의 병사로 끝내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둔이 장기화
되면서 제주의 백성들과 마찰도 있었다. 궁핍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제주민들에게
그들은 또 다른 외부세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삼별초 이후 제주는 100년 동안 몽고(원)의 지배를 받았다. 삼별초의 항쟁과 죽음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외세에 대항한 정신적 자주성은 어느 정도 인정해야겠지만 그 의미는
7-80년 군사정권 하에서 많이 과장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들은 최씨 무인정권 아래서
조직되었다는 태동의 한계를 많은 부분에서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어승생악 御乘生嶽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였다.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넘어오는 길에 들렸다.
어승생악은 한라산에 있는 360개의 오름들중에서 가장(?) 큰 오름이라고 한다.
높이는 1,169미터. 어리목광장에서 차를 대고 탐방안내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30분쯤
걸으면 정상에 닿는다. 용눈이 오름보다는 가파르지만 너무 힘들지는 않는 길이다.
오르는 길은 나무숲으로 시야가 가려있고 정상에서 보는 전망은 시원하다.
우뚝한 한라산을 등뒤로 하고 서면 제주시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투자가 아깝지 않은 풍경이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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