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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by 장돌뱅이. 2013. 6. 6.

 
*위 사진 : 한국의 한 서점에서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내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 김기택의 시,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시를 읽고
듣던 음악과 집안의 불을 모두 끄고
창문을 연 채로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여 보았다.
어떤 벌레소리들이 들려오는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주위가 조용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서울의 아파트  화단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작은 벌레들이 어디선가
맹렬한 울음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곤 하지 않았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아예 화단 위에 서 보았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무성한 잔디가
기실은 작은 벌레 하나 거느리지 못할만큼
황폐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아무리 따뜻한 샌디에고지만
그래도 겨울을 지난 터라
조금은 더 기다려야
벌레들이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시 방으로 돌아오며
잠시 생각했다.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들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

김기택의 시집 『소』를 읽다.

(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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