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아내와 경기도 광주 일대를 돌아다닌 적이 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여행이라 하기에는 좀 뭐하지만
우리는 그 일대에 흩어져 있는 나무 장승들을 찾아 몇번인가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때 천진암이라는 안내판을 본 기억이 있다.
물론 가보지는 않았다.
이름과는 달리 그곳이 불교가 아닌 천주교와 관련한 어떤 내력을
지닌 곳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뿐이었다.
우리에게 천주교가 아무 의미가 없던 시절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행은 관심과 필요의 산물이다.
사는 일이 그렇 듯이.
그 천진암을 잠시 다녀왔다.
어느 날 우연히 우리에게 다가온 천주교에
굳게 손을 잡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그 언저리를 배회할 뿐인 아내와 나는
아직 심지 얕은 초심자일 뿐이다.
해서 이번 천진암행은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에 대한
'성지 순례'의 의미라기보다는 세례를 받으며
같은 이름의 인연을 갖게 된 '선배' 정약종에게
잠시 인사라도 올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중부고속도로 광주 나들목을 나와 앵자산 기슭의 천진암터를 찾아가는 길을
누군가 예수의 제자 야곱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었던 스페인의 길을 빗대어
한국의 '산티아고의 길'이라 부르기도 했다. 쉬지 않고 한달여를 걸어야 한다는
산티아고의 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천진암은 차로도 한참을 들어가야하는 계곡
깊숙히 위차하고 있었다.
1779년부터 수년 간 천진암에선 이익의 영향을 받아 서학에 눈을 뜬
남인계 소장 유학자들이 모여 실학과 천주학에 대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광암 이벽, 녹암 권철신, 만천 이승훈, 손암 정약전, 선암 정약종,
다산 정약용과 권상학 등이었다. 서학의 일부였던 천주학은 학문적 관심에서
점차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천진암은 한국 천주신앙의 발상지가 되었다.
*위 사진 : 광암 이벽을 기리는 광암성당. 작고 아담한 모습이 이 땅의 초기 천주교의 분위기를
전하는 듯 했다. 인근 절에서 보내온 듯한 성탄절 축하 꽃다발이 보는 사람을 흐믓하게
했다. 서로의 존재와 다름을 인정해 주는 배려. 그것이야 말로 종교적인 마음이 아닐까
한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곳에서 천주학을 공부했던 정약종, 이승훈 등이
모두 참수 되었고 천진암에 있던 10여 명의 스님들도 함께 죽음을 당한 후
절은 폐사가 되었다.
천진암의 초입은 천주교유적지를 성역화 하기 위한 여러 공사가 진행중이어서인지
다소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우리의 눈에는 다소 번잡스럽게만 보이는 종교적 내용의
여러 입간판은 한국천주교발상지로서 지녀야할 경건함을 위해 좀더 단정하게
정리되었으면 싶다.
주차장을 뒤로하고 흰 십자가가 우뚝 선 언덕길을 오르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천진암대성당이 들어설 자리라고 한다.
왼편으로 경모성당과 박물관(?) 등의 건물이 보였다.
*위 사진 : "한국 천주교 발상 성지 천진암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 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화목하기를 비노라" 라는 교황의 강복문이 새겨진 돌.
드넓은 공터.
무게가 30톤에 달한다는 1993년 교황 바오로 2세의 강복문이 새겨진 돌과
무려 100톤이라는 제대석.
조감도에 나타난 거대한 성당건물.
성역화 작업은 반드시 거대함을 동반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던져보며 우리는 공터를 가로 질러 숲길로 들어섰다.
애초의 천진암이 작고 소박한 암자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깊은 산중의 산허리를 뭉툭 잘라낸 황량한 풍경은 고요한 주변과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과 생경함을 지니고 있었다.
숲길에서 처음 만난 것은 언덕 위에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탑이었다.
기념탑 뒤로 이어진 숲길은 폭신한 낙엽이 깔린 소담스런 길이었다.
옛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숲 속에 검은색의 "천진암강학당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200여 년 전 새로운 학문과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 인재들은 이곳에 모여 자신들의 삶과 세상을 사색하고 탐구했을 것이다.
그 위쪽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림 성현 5위 - 광암 이벽을 비롯한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가 모셔져 있다.
묘역 우측에는 광암 이벽의 독서처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아내와 나는 성호를 긋고 묵념을 올린 후 정약종의 묘 앞에 섰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말을 건네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허락도 없이 당신의 이름을 빌린 장돌뱅이입니다.
당신의 신앙은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듯 하고
아직 내겐 당신의 삶처럼 절실함을 지니진 못했지만 허락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위 사진 : 선암 정약종의 묘
『흑산도 하늘길』이란 한승원의 소설 속에서 정약종을 만난 적이 있다.
소설은 정약종의 형이며 『자산어보』라는 남해안 물고기의 생태를 쓴 정약전을
그린 것이었지만 그 속에 정약용과 함께 정약종이 등장한다.
(정약전은) 약종과 약용과 함께 글을 읽다가 근처 강으로 물놀이를 하러 갔었다.
호로병 속에 된장을 넣어가지고 가서 수초들 어우러져 있는 웅덩이에 놓아두면
피라미와 붕어와 쏘가리 새*끼들이 들어왔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물통 속에 넣어
키웠다. 이튿날 피라미와 붕어가 죽어 물 위로 떠올랐는데, 약종이 그것을 땅에 묻어
주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약용은 한동안 죽은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공부방
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뒤에 손에 참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왔다. 거기에는 헤엄치는
피라미와 붕어가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을, 눔물을 훔치는 약종에게 보이면서
"작은 형님, 아까 그 피라미하고 붕어 여기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하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일화이지만 훗날 큰 학자가 될 정약용과 독실한 천주교인이 될
정약종의 모습이 엿보인다.
함께 세례를 받았던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는 외가쪽 형인 윤지충이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리를 따르느라 어머니의 위패를 모시지 않아 조정으로부터 '불효자식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국가에 반역하는 못된 무리'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진 후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이 때 약용은 약전에게 단호하게 말했었다.
"중형님, 이 사람들 큰일 낼 사람들입니다. 저는 천주학을 다만 학문으로서 한번 훓어
보았을 뿐, 깊이 신앙하지는 않았습니다. ... 천주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선비된
자로서 온당하지도 바람직하지도 못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승에서 해야 할 일이
무진장 남아 있습니다. ... 유학가는 모름지기 사는 날까지 살면서 자기의 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 사업을 통해 정심에 이르러야 합니다. 저는 곧 제 잘못을 자척하는 상소를
올려야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차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이옵니다.
형님께서도 깊이 생각하시고 돌아서십시오. 약종 형님께는 제가 찾아가서 우리 형제의
뜻을 이야기하고 마음을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뒤 다시 약전을 찾아온 약용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변해버렸어요. 예전의 착하고 다정다감한 약종 형님이 아니었어요. 저는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형님, 제발 학문으로서만 알 뿐 신앙하지는 마십시오' 하고요.
그러니까 '나보고 너처럼 하느님을 배반하라는 것이냐?' 하고 따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조상신이 있고 성인의 말씀 속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추궁하니까 그 형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형제는 사형제가 아니고 삼형제였다고 생각하거라.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면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어났을 뿐 여호와 하느님의 아들이니라.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른 형제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할 테니 염려 말거라.
하느님께서 그와 같이 배려할 것이니라.'
약종 형님의 생각이 이 정도입니다. 제 힘으로는 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튿날 약전이 새벽같이 약종을 찾아가 타일러 보았지만 약종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런 뒤 약종과 그들 두 형제 사이는 서먹서먹해졌다. 서로 자리를 피했다.
약종은 형 약전이 배교한 것과 약용이 하느님과 형인 자기에게 왼고개를 틀어 버린 것을
서운해하고 슬퍼했다. 이벽과 이승훈과 주문모 신부에게 그 서운함을 말하곤 했고,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형제 된 자로서 약전과 약용의 배교를 막지 못한 자책과
부끄러움에 대하여 썼다. 자기는 그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서라도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결심도 썼다.
한데 의금부에서 약전과 약용을 국문할 때 약종의그 편지가 나타났고, 그 편지의 내용이
그들 두 형제에게 유배형을 가져다주었다.
약전은 운명을 생각했다. 약종 하나를 데려가면서 다른 두 형제를 살려 두도록 한 것은
어쩌면 어떤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도 모른다 싶었다.
(소설 216- 218쪽 요약)
정약종 자신은 물론 그의 아내와 자식들 모두가 참혹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천주교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죽음의 역사적 의미를 묻기에 앞서
천주교의 무엇이 죽은 물고기를 보고 눈물을 흐리던 여린 심성의 그를
그토록 강하고 담대하게 변화시켰을까 궁금해진다.
그가 보고 느꼈던 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
문득 윤동주의 시 한 편을 떠올려 꽃대신 그의 무덤에 바치고
아내와 나는 발길을 되돌렸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의 시, "십자가"-
(2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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