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산하대지로 귀의하시다

by 장돌뱅이. 2013. 7. 10.

몇해 전 아내와 성북동의 길상사를 찾은 적이 있다. 햇볕이 따스하던 이른 봄날이었다.
그때도 우리는 절마당을 거닐며 법정스님을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그 기억이 마치 우리가 스님을 직접 뵙기라도 한 것인양 선명하다.
책을 통해 늘 스님을 가깝게 느끼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 어제 스님이 입적하셨다고 한다.

책을 읽고서도 집착과 욕망의 무거운 사슬을 걸치고 덜그럭거리며 살아가는 나로서는 스님의 무소유가 범접할 수 없이 높아 보인다. 살랑거리 듯 불어가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워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우뚝한 바위처럼 거기에 서계시던 분.

그런  그가 담담하게 이승과 이별을 하였으므로 우리도 수선을 피우며 슬퍼할 까닭은 없겠다.
하지만 그가 떠난 자리가 "새들이 떠나간 숲" 보다 더 적막할 것임은 분명하다.
오래도록.

*위 사진 : 길상사의 관세음보살상. 이 상을 조각한 최종태는 카톨릭신자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상의 모습이 성당 앞에서 보는 성모마리아상을 닮아 있다. 타종교와의 경계에도 자유로웠던 스님의 의지가 스며있는것도 같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가 남긴 아무 책이나 꺼내어 아무 쪽이나 조용히 읽어보자. 우리가 저마다 그 글속 한 문장만 행동에 옮길 수 있어도 세상은 지금처럼 소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신선한 아침입니다. 간밤에 한줄기 소나기 지나더니 풀잎마다 구슬같은 이슬이 맺혀 있습니다. 나뭇가지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투명한 초록으로 빛을 발합니다. 세상이 열린 듯한 이런 아침은, 일찍 깨어난 살아있는 것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나는 이 여름 앞뜰에서 풀 뽑는 일로 무심(無心)을 익히면서 풀 향기 같이 잔잔한 기쁨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해가 뜨기 전 미명(未明)의 예감 속에서, 그리고 해가 기운 뒤 산 그늘 아래서 풀을 하나하나 뽑고 있으면 내 마음이 아주 한적하고 편해집니다. 방안에서 좌선을 하거나 독경하는 시간보다 훨씬 생생하고 그윽한 정신 상태입니다. (...) 간밤에 내린 비로 땅이 촉촉이 젖어 오늘 아침에는 풀이 아주 잘 뽑혔습니다. 일에 재미가 붙어 부풀듯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저 풀을 뽑고 싸리비로 뜰을 말끔히 쓸었더니, 내 마음 속 뜰도 아주 산뜻하고 말끔해졌습니다. (...) 일 마치고 눈부신 초록의 햇살을 받으면서 개울가에 나가 흐르는 물을 한 바가지 떠 마셨습니다. 순간 산천의 맑은 정기가 내 영혼과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모으면서 두런두런 이런 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산하대지(山河大地)여, 고맙고 고맙습니다!
이 오두막이여,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이토록 신선한 아침이여,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나이다!

-수필집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중에서 -

 

 (2010.3에 쓴 글)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GOLDSTAR  (0) 2013.07.10
강아지똥과 권정생 선생님  (0) 2013.07.10
눈길의 계룡산  (0) 2013.07.10
BACK HOME AGAIN!  (0) 2013.07.10
흙으로 빚어낸 사람  (0) 2013.07.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