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결혼 29주년 올해는 미국 생활을 정리하는 부산함 속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6년 동안 익숙하고 친근했던 것들과 헤어진다는 아쉬움과
다시 낯선 곳에서 맞이할 새로운 시간에 대한 흥분과 은근한 부담감이
뒤섞인 이런저런 감정 탓일 겁니다.
돌아다보면 6년이건 29년이건 지나간 시간은 늘 수많은 변화와 굴곡의 기억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것 모두를 우리의 삶을 다져온 소중한 의미로 즐겁게 회상할 수 있는 이유는
어느 순간도 우리가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서툰 나의 솜씨지만 저녁 식탁을 준비하고 당신과 마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맑고 투명한 수채화 같은 기억들만을 꺼내어 당신과 웃고 싶습니다.
어느 공원길에선가 처음 손을 잡던 날의 설렘과 수줍음이나.
오래도록 말없이 걸었던 코스모스 핀 강변길.
산 위로 멀리 비늘 같은 구름이 희게 흐르던 푸른 하늘.
아픈 상처를 고백하며 서로 나눈 울음과 위로 같은 것들 말입니다.
오지 않은 앞날은 알 수 없어 신비롭지만 또 그래서 두렵기도 합니다.
삶은 규정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몫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므로
예상치 못한 어느 길목에선가는 굽이치고 흔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나눈 29년은 그럴 때마다 묵직한 뚝심이 되어 남으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29년에 지나간 29년을 그대로 포개고 싶습니다.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
해서 삶의 또 한 단락을 짓는 이즈음, 29년 전 우리의 처음이 그랬듯
새로운 출발을 위해 당신과 함께 다시 짐을 꾸리는 이 부산함이 싫지 않습니다.
CEDAR BREAK NATIONAL MONUMENT(이하 CBNM)
*위 사진 : 이번 여행의 주요 경유지 (A) CEDAR CITY -(B) PAGE -(C) SAN DUNE, 그리고 LAS VEGAS
샌디에고에서 CEDAR CITY까지는 운전시간만 7시간 반 - 중간에 휴식과 차 연료를
채우기 위해 한 시간 반 정도를 허비했으니 총 9시간이 걸렸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주를 지나 유타에 이르는 800킬로미터.
아침에 출발하였음에도 미리 예약해둔 숙소에 들 쯤에는 짧은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깃들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서울에서 남쪽 땅끝을 왕복한 거리를 달려온 것이지만 미국 전도를 놓고 보면
매우 작은 부분을 이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에서 자동차로 여행을 하면 종종
미국 국토의 거대함을 절감하게 된다. 한반도의 45배 (남한의 98배)에 달하는 크기이다.
도로의 모양새도 크기에 걸맞다. 걸핏하면 도로는 지평선 끝에서 작은 점이 되는 일직선의
형태를 띤다. 뒤쪽 지평선을 향해 맹렬하게 몰려가는 도로의 모습이 자동차 뒷거울을 통해
까마득히 보이기도 한다. 앞뒤로 차 한 대도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가속기 페달에서 발을
떼도 일정한 속도로 달릴 수 있는 크루즈 모드는 이럴 때 편리하다. 거기에 핸들을 꺾거나
차선을 거의 바꿀 필요도 거의 없다. 뭔가 허전하고 심심할 정도이다. 단순히 직선 주행을
하다보면 맹렬한 속도감은 사라지고 아주 부드러운 출렁임만 느끼게 된다.
차를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주공간을 유영하는 것 같다.
모처럼의 짧은 여행에서조차도 부득불 도로 위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만만찮다 보니
미국은 한국식 생활패턴(짧은 일수의 휴가 패턴)과는 잘 맞지 않는 여행지라고 할 수도 있다.
볼거리는 웅장하고 감동적이지만 볼거리 사이의 거리가 멀어 시간상 매우 비효율적인 구조가 된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그것은 종종 장점이 되기도 한다. 차안이라는 고립되고 한정된 공간에선
집중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미국 여행 중 아내와 차안에서 하는 일은 주로 음악을 듣는 일이다.
집에서 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기분이 내키면 함께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묵주기도를 할 때도 많다. 침묵의 시간을 즐기기도 한다.
그리고 남는 시간엔 잡담을 나눈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들.
부부간의 소통이란 어떠한 당위적 목표를 위해 내거는 굳은 다짐이나 책임의 확인이 아니라
아주 작고 시시한 일들에 대한 공유에 있다고 아내와 나는 생각한다.
아니 생각 이전에 그런 나눔과 공유의 시간이 주는 평온함이 좋다.
CEDAR CITY는 작은 시골 읍내와 같은 마을이다. 인심도 그랬다.
아침에 차의 시동을 거니 타이어 압력이 낮다는 표시가 들어와 있었다.
혹시 펑크가 났을까 상태를 확인해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가까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사정을 말하니 에어밸브를 열어주었다. 그런데 공기를 주입해도 계기판의 표시등은 꺼지질 않았다.
주유소의 아가씨는 가게까지 비워두고 직접 체크게이지를 들고 나와 압력을 재가며 다시 공기를
넣어주었다. 그래도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일단 차를 몰고 가다가 보면 표시등이 꺼질 수도 있다는
말에 잠시 달려보았는데도마찬가지였다.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게이지로 다시 압력을 체크해보려는데 한 동네 아저씨가
다가와 문제가 있냐고 물었다. 사정을 설명하니 같이 체크를 해주었다. 나의 게이지로도 압력은
정상이었다. 아저씨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먼길을 갈 것이라면 수리점에 가서 체크를 해보는
게 좋겠다고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른 아침 첫 손님으론 별 탐탁찮은 손님이었겠지만 수리점의 직원들은
친절하고 경쾌한 목소리로 맞아주었다. 디지털게이지로 압력을 체크해본 결과 운전석 뒤쪽 타이어의
압력이 떨어져 있었다. 직원은 타이어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곤 펑크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망실된 타이어밸브의 캡까지 가져다가 끼워주었다.
표시등은 원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여행자와 이방인에게 우리도 좀 더 친절해지자고 아내와 다짐을 해보았다.
CEDAR CITY에서 멀지 않은 CBNM엔 생각지도 않은 눈이 내려 있었다.
샌디에고의 (가을이지만) 여름 같은 날씨에서 네바다와 유타의 가을을 거쳐 겨울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일만 피트가 넘는 고지대이니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9월부터 눈이 내릴 때도 있다고 한다.
다양한 계절의 공존 - 그것은 미국 자연의 특징이자 국토의 광활함을 다르게 표현하는 방식이 되겠다.
CBNM에 이르는 하루 동안의 여행이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능선길의 뷰포인트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문자 그대로 “BREATHTAKING”의 절경이었다.
멀리 자이언국립공원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ANTELOPE CANYON(이하 AC)
CBNM에 나와 89번 도로를 탔다. 계절은 다시 가을로 변해 있었다.
3시간 정도를 달려 ARIZONA 주의 작은 도시 PAGE에 도착했다.
PAGE에 이르는 동안 도로는 교통량이 많지 않아 한적했다. 지루할 수도 있는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 준 것은 길옆으로는 자주 나타나는 한국의 웬만한 국립공원 같은
절경이었다.
PAGE는 콜로라도 강 상류를 막아 생긴 GLEN CANYON NATIONAL RECREATION AREA를
돌아볼 수 있는 베이스캠프이다. 나바호 족의 삶의 근거지이자 관광특구(NAVAJO NATION PARKS
& RECREATION) 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PAGE에 도착하니 마침 AC로 출발하는 투어가 있었다.
UTAH주보다는 한 시간 늦은 아리조나의 시차가 만들어준 횡재였다.
원래는 다음 날 아침 투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AC는 비포장의 사막 지대에 있어 개별적으로는 갈 수가 없는 곳이다.
이곳 인디언들이 운영하는 투어를 이용해야 한다. 비포장 사막길을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트럭을 타고 20여 분을 달린 끝에 AC의 입구에 도착했다.
트럭 안의 기둥에는 가이드에게 팁을 달라는 여러나라의 말이 쓰여 있었다. 한글도 보였다.
운전수가 가이드이였다. 사실 이곳의 가이드는 가이드라기보다는 AC의 계곡 내에서 일정 시간에
맞춰 여행객들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하는 조정자에 가까웠다. AC에는 매일 같이 수용 한계치에
가까운 관광객이 다녀가는 듯 했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로, 자기팀을 이끌고 가야하는 가이드들의
목소리로, 관람하는 내내 AC의 좁은 협곡은 좀 과장을 하자면 출근시간의 지하철역과 같았다. 샌디에고의
한 이웃이 AC를 다녀오고 나서 사진이 더 좋다고 했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투어에서 돌아와 HORSESHOE BEND(이하 HB)로 갔다.
HB는 우리나라 영월 서강 ‘한반도 지형’이나 경북 예천의 회룡포, 안동의 물돌이동(하회)와 같이
강물이 말발굽처럼 돌아가는 곳이다. 장구한 기간에 걸쳐 콜로라도 강물의 침식이 빚어낸 걸작이다.
그랜드캐년과 같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절벽의 높이는 305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입장료는 없지만 주차장에서 10여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CORAL PINK SAND DUNE STATE PARK (이하 COSD)
AC투어를 하루 앞당겨 했기 때문에 라스베가스까지 가는 뒷날의 일정은 한결 여유가 있었다.
느긋하게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에 커피까지 곁들이고 나서 출발을 했다.
어제 왔던 89번 도로를 되돌아가는 길에 있는 COSD를 중간 기착지로 잡았다.
KANAB이란 제법 큰 마을에서 자동차 연료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COSD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왔다. PAGE에선 대략 2시간쯤이 걸렸다.
SAND DUNE 앞에 붙은 ‘산호색 분홍’이라는 수식어가 예쁜 느낌을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크기의 사막 같은 모래언덕이 아닌 아담한 규모의 모래 봉우리도 친근감이 갔다.
손으로 집어본 모래는 균일한 크기의 갈색 설탕과 같았다. 주변 나바호 사암(SAND STONE)의 작은
입자들을 쓸어오던 바람이 이곳 산과 산 사이를 지나며 속도가 떨어지면서 떨군 모래들이 쌓인
것이라고 한다. 모래언덕엔 일정한 길이 없다. 바람이 수시로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모래언덕을 개구쟁이처럼 오르내리며 놀았다.
LAS VEGAS
COSD를 떠나 15번 프리웨이를 남쪽으로 달렸다. ST GEORGE와 라스베가스 사이에 바위계곡을 지났다.
여러 번 지난 길목이지만 지날 때마다 달리는 차에서만 보기에는 풍경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이곳에서 휴식과 식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적당한 장소가 없을까 생각하는데
마침 VIRGINE RIVER RECREATION AREA라는 안내판이 나왔다. 2불의 입장료를 내야했다.
대신에 경치 좋은 계곡에 여기저기 그늘집을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서 죽과 과일로 점심을 대신했다.
햇살이 우리나라 초가을처럼 더 없이 좋은 날이었다.
라스베가스 북쪽 초입에 있는 NORTH PREMIUM 아울렛에 들렸다.
늘 구경이 90%인 아내의 쇼핑이지만 이번엔 29주년인만큼 아내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그에 앞서 우선은 투덜거리지 않고 두 시간 정도 묵묵히 따라다니는 것이 아내에겐 가장 큰 선물이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아내와 화려한 라스베가스의 밤거리를 걸었다.
미국생활을 하면서 제법 여러 번 온 곳이지만 막상 미국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불빛 하나하나가 각별한 의미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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