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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6

설악산 일대1 서울에서 속초까지 장거리 운전을 할 때 그를 옆에 태운 채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려간 것은 잘못이었다 틈틈이 눈을 돌려 북한강과 설악산을 배경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했을 것을 침묵은 결코 미덕이 아닌데 ······ 긴 세월 함께 살면서도 그와 많은 이야기 나누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다 얼굴을 마주 쳐다보거나 별다른 말 주고 받을 필요도 없이 속속들이 서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를 곧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 여름 바닷가에서 물귀신 장난치고 첫눈 내린 날 살금살금 다가가서 눈 한 줌 목덜미에 쑤셔넣고 깔깔대던 순간들이 더 많았어야 한다 하다못해 찌개맛이 너무 싱겁다고 음식 솜씨를 탓하고 월급이 적다고 구박이라도 서로 자주 했어야 한다 괜찮아 워낙 그런거야 언제나 위안의 물기가 어린 .. 2022. 6. 17.
쓸모없어 소중한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무슨 용건이 있어서 만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빚 갚을 돈을 빌려주지도 못하고 승진 및 전보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아들딸 취직을 시켜주지도 못하고 오래 사귀어보았자 내가 별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는 오래전에 깨달았고 나도 그것을 오래전에 알아차렸다 그래도 내가 모른 척하는 것을 그도 오래전에 눈치챘을 터이다 만나면 그저 반가울 뿐 서로가 별로 쓸모없는 친구로 어느새 마흔다섯 해 우리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 김광규, 「쓸모없는 친구」 - 코로나 대유행이 만 2년을 지났다. 손자를 보는 틈틈이 산책을 하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짧은 여행을 하며 지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며 만들 수 있는 요리 종류도 늘어났다. 책도 이전보다 좀 .. 2022. 1. 22.
결혼37주년입니다 얼마 전 제주에서 보낸 한 달은 산과 바다, 숲과 길, 사람과 음식들로 아름다웠습니다. 앞으로도 한동안 그 기억들은 진한 여운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 머무를 것 같습니다. 여행의 소중함은 새로운 경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와 만나는 현실의 진부함을 견디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삶에 비유하거나 삶을 여행에 비유할 것입니다. 당신과 제가 함께 삶의 시공간을 여행한 지 서른 하고도 일곱 해가 지났습니다. 제겐 지나간 많은 순간들이 바로 어제 아침에 마주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셨던 기억처럼 생생합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던 무교동 길과 음악 다방에 흐르던 옛 노래, 당신과 걷던 오월 어느 날의 진한 아카시아 향기, 군입대 하던 날 당신이 입고 나왔던 자줏빛 줄.. 2021. 10. 29.
떠남은 축복이고 축제 그래도 그대는 떠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집안 단속을 하고 문을 잠갔나 확인하고 손때 묻은 세간살이 가득 찬 정든 집을 등 뒤로 남겨놓은 채 손가방만 하나 들고 결연히 떠나서 새 집을 찾는다 언젠가 그 집을 가득 채우고 다시 비어놓은 채 뒤돌아보며 집을 떠날 그대여 몇 번이고 망설이며 떠났다가 소리없이 돌아와 혼자서 다시 떠나는 그대여 --김광규, 「다시 떠나는 그대」- '다시 떠나는 그대여'라는 말이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처럼 새삼 정겹다. 언젠가 아내와 딸아이와 다녀온, 아유타야며 후아힌이며 파타야며 하는 곳으로 그냥 가볍게 떠나고 싶다. 인생은 늘 떠나는 것이라는, 진지한 그러나 다소 진부해진 의미는 잠시 접어두어도 좋겠다. 이십 년이 흐른 후 우리가 이룬 일들보다 하지 못한 일들로 더 깊.. 2021. 6. 13.
내가 읽은 쉬운 시 122 - 김광규의「도다리를 먹으며」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 해서 우리 대통령과 회의를 하고 우리의 다른 반쪽인 북한의 지도자를 만났다. 기자 회견장을 채운 화려한 말잔치의 정치적 이면과 속셈을 읽어낼 지식과 재주는 내게 없다. 다만 그의 무소불위의 힘과 행보가 이 땅에 오래 헤어진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실향민들에게 고향을 찾아주고, 높은 철조망을 걷어 비무장 지대를 남과 북 끝까지 넓히고 무기를 내려 핵폭탄도 핵우산도 없는 세상을 만드는 단초라도 남기고 갔으면 하는 '순진한' 바램을 가져볼 뿐이다. 어쨌거나 만남은 결별보다, 대화는 욕설보다, 비싼 평화가 싼 전쟁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가 수십 대 차량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서울 한 복판을 달리는 도로변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열심히 흔드는 ('미국인보다 미국을 더 사랑하는' 듯한) .. 2019. 6. 30.
내가 읽은 쉬운 시 16 - 엘뤼아르와 김광규 무심코 달력에 눈을 주니 이번 주말에 4.19가 있다. 4.19를 제때에 기억하는 사람이 요즈음엔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도 그렇다. 언제였던가? 사일구가 의거(義擧)인가 혁명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혁명이라면 무엇을 성취했고 ‘미완’이라면 무엇을 숙제로 남겼는가를 두고, 설익은 논쟁 끝에 자못 흥분하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뽈 엘뤼아르 P. ELUARD의 시는 그런 시절에 읽었다. 1895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엘뤼아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점령 되었을 때「야간통행금지」란 제목의 시를 썼다. 어쩌란 말인가 문은 감시받고 있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갇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거리는 차단되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도시는 정복되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도시는 굶주려 있었는데.. 2014.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