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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6

냉잇국 나생이는 냉이의 내 고향 사투리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나생이꽃 피어 쇠기 전에 철따라 다른 풀잎 보내주시는 들녘에 늦지 않게 나가보려고 조바심 낸 적이 있다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본 적이 있다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그 자그맣고 매촘하니 싸아한 것을 나생이라 불렀는데 그때의 그 '나새이'는 도대체 적어볼 수가 없다 흙살 속에 오롯하니 흰 뿌리 드리우듯 아래로 스며드는 발음인 '나'를 다치지 않게 살짝만 당겨 올리면서 햇살을 조물락거리듯 공기 속에 알주머니를 달아주듯 '이'를 궁글려 '새'를 건너가게 하는 그 '나새이', 허공에 난 새들의 길목 울 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내가 봄 들녘에 쪼그려 앉아 두 귀를 모으고 듣던 그 자그마하니 수런수런 깃 치는 연둣빛 소리를 .. 2022. 2. 1.
원하나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번 크리스마스부터 아내는 성경 쓰기를 하겠다고 노트를 구입했다. 몇 해 전 아내는 신약성경을 필사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구약을 쓰겠다고 한다. 5년쯤 잡는다고 하지만 그 5년은 반드시 시간적인 계획이 아니라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쓰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분명 아내는 그보다 앞서 구약 필사를 끝낼 것이다. 나는 뭘할까 생각하다가 아내가 성경을 쓰는 동안 마주 앉아 영어 성경을 읽기로 했다. 아내보다 오래 걸리지 싶다. 연애시절 아내는 내게 영어 성경인 "GOOD NEWS BIBLE" 선물한 적이 있다. 둘 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을 때지만 예수라는 젊은 사내를 '스도 형님'으로 부르며 함께 좋아했었다. 이번에는 "THE .. 2021. 12. 24.
마스크 지인이 아침 산책길에 마스크를 쓰지 않고 가는 사람에게 정중하게 마스크를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놀란 듯 후다닥 마스크를 쓰더니 잠시 후에 그런 자신에 화가 났던지 다시 지인에게 다가와 "밖에서는 안 써도 되는 거 아닙니까?" 퉁명스레 말하면서 썼던 마스크를 벗어 다시 손에 들고 가더란다. 나는 지인에게 '조금만 비겁하면(?) 세상이 즐거운 법'이니 세상의 억지에 좀 무뎌지라고 '비겁한' 충고를 했다. 단풍철 좁은 등산길에서도 마스크 문제로 가끔씩 사람들 사이에 실랑이가 난다. 다른 사람을 위해 까짓 마스크 좀 확실하게 코 위로 끌어올려 주면 좋으련만. 밤에 길을 나서면서 마주 오는 사람을 위해 등불을 드는, 앞을 못보는 시각 장애인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배려는 상대방만이 아니라 결국 자.. 2021. 11. 22.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 도토리묵은 당연히 도토리로 만든다. 하지만 학술적으로 도토리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종은 없다. 참나무과 중에서 참나무속, 즉 상수리 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등을 통틀어 사람들은 도토리나무라고 한다. 도토리와 상수리는 모양만 약간 다를 뿐 결국 도토리지만 구별해서 부르기도 한다. 어릴 적엔 원기둥처럼 길쭉한 것을 도토리, 동그란 구슬 같은 것을 상수리라고 불렀다. 어른들이 쓰는 성냥개비를 반으로 부러뜨려 도토리나 상수리 뒤에 박아 팽이를 만들었는데, 방바닥에서 손가락으로 돌리면 도토리는 금세 쓰러지는 반면 상수리는 오래 돌았다. 이정록 시인은 글 쓰는 사람답게 좀 더 재미있게 도토리와 상수리를 구분했다. "드러누워 배꼽에 얹어놓고 흔들었을 때 굴러 떨어지면 상수리, 잘 박.. 2021. 1. 19.
영화『기쁜 우리 젊은 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친 우리나라 옛 영화를 유튜브에 공개 중이다. (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 : https://www.youtube.com/user/KoreanFilm ) 어린 시절 천막극장 가마니 좌석에 앉아 콧날 시큰한 울음을 꾸역꾸역 참으며 보았던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부터 학창시절과 청년기를 보냈던 7080의 영화까지 대략 190 편의 영화가 올라있다. 지나간 영화는 추억의 보고이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영화는 첨단의(그러나 자주 접할 수 없던) 볼거리였고 프로레슬러 김일의 박치기와 함께 아이들의 대화 속에 자주 오르내리던 주제였던 것이다. 리마스터링된 영화는 영화 자체는 물론, 영화를 보던 시절과 영화 속 옛 풍경까지 아내와 이야깃.. 2020. 7. 8.
내가 읽은 쉬운 시 104 - 김선우의「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봄이 한창이라 꽃이 지천이다. 아파트 화단에도 공원길에도. 작건 크건 화려하건 소박하건 자연적이건 인위적이건. 어디에서 어떻게 핀들 꽃이 아니랴. 더불어 화사해진 마음으로 바라보고자 하지만 아내와 아프게 견디는 봄이다.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2019.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