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봄동6

아차산숲속도서관 아내와 함께 평소 보다 좀 먼 "아차산숲속도서관"까지 걷기로 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잔잔했다. 완고하게 보이던 호수의 얼음은 어느덧 풀려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은 쌀쌀한 듯했지만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어린이 대공원을 지나 아차산으로 향했다. 나무 끝에 물기가 아주 연하게 차올라 희미하게 연둣빛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아차산숲속도서관은 작년 10월에 개관한, 아차산 생태공원 옆, 이름대로 숲 속에 있었다. 지상 2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에는 일반·아동도서 약 5000여 권이 있는 자료실이, 2층에는 신문과 잡지들이 있는, 아담하고 예쁜 도서관이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아내와 나는 2층 열람실에 자리를 잡았다. 여행 잡지를 골라, 세부적인 기사보다는 사진 위주로 아내와 돌려.. 2023. 2. 20.
겨울숲과 봄똥 2월. 아직 겨울은 끝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봄기운도 쉽게 느껴지지 않는 애매한 달이다. 그래도 요며칠은 날이 푸근해서 아내와 오래간만에 서울숲을 걸을 수 있었다. 짙은 갈색의 나무들은 지난 가을에 잎을 떨군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있었다. 겨울숲이 주는 차분한 침잠(沈潛)과 깊은 적요로움이 감미롭게 다가왔다. 화사한 봄과, 싱싱하고 무성한 여름과, 명징하고 화려한 가을이 쌓여 숙성이 되면 그런 겨울숲의 풍요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가끔씩 눈과 얼음이 녹아 말랑말랑한 땅을 만났다. 굳이 피해가며 걷고 싶지 않았다. 앞서간 다른 사람들도 그랬는지 흙에는 여러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내와 하굣길 신발 밑창에 달라붙은 진흙을 나뭇가지로 떼어내던 어린 시절을 기억해내기도 했다. 봄똥은 겨울이 가기 전에, 혹은 겨울을.. 2023. 2. 13.
2월의 식탁 2월엔 보통의 달에 비해 설음식과 보름 음식이 더해졌다. 특히 '봄똥'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노지에서 겨울을 이겨낸 봄동엔 겨울과 봄의 맛이 함께 녹아 있었다. 무엇이든 제철이어야 싸고 맛있다. *이전 글 참조: 내가 읽은 쉬운 시 168 - 안도현의「봄똥」 2월의 제철 식재료는 단연 '봄똥'이다. 마트에 가면 좋은 가격으로 가판대에 가득 놓여있다. 봄똥'은 겨울을 노지에서 보내느라 속이 들지 않고 잎이 옆으로 납작하게 퍼져 있다. 양팔을 벌리 듯 jangdolbange.tistory.com 딸과 사위는 내가 만든 봄동 겉절이에 감동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아내가 담근 걸로 오해를 해서 섭섭함과 뿌듯함을 동시에 주었다. 아내는 봄동으로 만든 전과 겉절이, 된장국 모두를 좋아한다. 그리고 봄동 쌈도. 손.. 2021. 3. 3.
내가 읽은 쉬운 시 168 - 안도현의「봄똥」 2월의 제철 식재료는 단연 '봄똥'이다. 봄동이 맞춤법에 맞지만 왠지 '봄똥'이라고 해야 더 어울려 보인다. 자장면이 아니고 짜장면이라고 해야 그렇듯이······ 마트에 가면 좋은 가격으로 가판대에 가득 놓여있다. '봄똥'은 겨울을 노지에서 보내느라 속이 들지 않고 잎이 옆으로 납작하게 퍼져 있다. 양팔을 벌리 듯 잎을 활짝 펴고 추위를 한껏 받아냈을 짙푸른 잎에서는 싱싱한 야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비타민C에 베타카로틴에 칼륨과 칼슘과 인이라는 발음도 어려운 성분이 풍부하다고 영양 학자들은 설명하지만 노란 중심부가 드러난 봄똥은 식재료에 앞서 그대로 꽃이다. 예쁘고도 맛있는 꽃이다. 찬물로 씻다가 한 조각을 아무런 양념 없이 씹어도 아삭거리는 식감 뒤에 고소하고 달달한 맛이 이어진다. 봄똥으로 겉절이를 .. 2020. 2. 22.
내가 읽은 쉬운 시 167 - 이사라의「밥의 힘」 어제는 우수(雨水)였다. 눈이 녹아서 비나 물이 되는 날이다. 봄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겠으나 올겨울은 별로 춥지 않아서 계절을 구분짓는 절기(節氣)의 의미가 무색하다. 게다가 세상이 코로나바이러스로 근심이 가득하다. 더더구나 이즈음엔 아내의 상심마저 깊어 차라리 '우수(憂愁)'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작년 S와 이별한 뒤, 아직도 아내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여린 상처를 할퀴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놀랍게도 가까운 사람의 행태라 아내가 더 아파하는 것 같다. 이별의 과정에는 냉담했으면서도 슬픔이나 추억은 과장하고 그마저도 홀로 독점하려 한다. 조악하고 부끄러운 생리를 정작 본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가장 뜨거운 기쁨도 가장 통절한 아픔도 사람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피해 가라는 옛말은 이럴 .. 2020. 2. 20.
내가 읽은 쉬운 시 94 - 김승희의「향연, 잔치국수」중 어수룩하게 넓은 국수 막사발에 물에 삶아 찬물에 헹궈 소반에 건져놓은 하이얗게 사리 지은 국수를 양껏 담고 그 위에 금빛 해 같은 노오란 달걀 지단 채 썰어 올려놓고 하이얀 달걀 지단 따로 채 썰어 올려놓고 파아란 애호박, 주황빛 당근도 채 썰어 볶아 올려놓고 빠알간 실고추도 몇개 올려드릴 때 무럭무럭 김나는 양은 국자로 잘 우려낸 따스한 멸치장국을 양껏 부어 양념장을 곁들여내면 헤어진 것들이 국물 안에서 만나는 그리운 환호성, 반갑고 반갑다는 축하의 아우성. 금방 어우러지는 사랑의 놀라움, 노오란 지단은 더 노랗고 새파란 애호박은 더 새파랗고 빠알간 실고추는 더 빠알갛고 따스한 멸치장국, 아픈 자, 배고픈 자, 추운 자, 지친 자 찬란한 채색 고명과 어울려 한사발 기쁘게 모두 모두 잔치국수 한사발 두 .. 2019.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