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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5

겨울나무 산책을 하며 헐벗은 겨울나무가 눈에 들어올 때면 동요 를 부르곤 했다. 아니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떠올리며 세상의 모든 겨울나무는 '세한도 속의 소나무'거나, 백석의 시에 나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언덕 위에 줄 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말없이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2024. 2. 13.
대박의 꿈, 현실이 되다 한 신부의 미사 강론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해외에서 주재할 때의 경험담이라고 했다. 한 번은 한국에서 노년의 여러 선배 신부들이 방문하여 행사와 지역 안내를 맡게 되었다. 며칠에 걸쳐 응대를 하다보니 피곤함도 쌓이고 사소한 일에도 '내가 뭐 시다바린가' 하는 식으로 미묘하게 감정이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큰일 없이 그럭저럭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귀국을 하는 날이 다가왔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선배들은 십시일반으로 모은 약간의 돈을 '고맙고 사랑한다'는 덕담과 함께 건네주었다. 돈봉투를 받는 순간 신부는 그동안 있었던 약간의 서운함조차 눈 녹듯 사라지고 '아! 선배님들이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하는 감동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성직자가 고백하는 세속적인(?) 이해타산에 성당 안은 웃음이 .. 2021. 12. 28.
툰양씨 다시 만나요 한국어 공부를 인연으로 만났던 미얀마 청년 툰양씨가 귀국을 했다. 수업시간에 본 그는 늘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야무져보이는 인상이었다. 미얀마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한국에서 2년 정도 일을 했다. 귀국할 때 코로나19 때문에 잠깐 소동이 있었다. 결혼 일정에 맞춰 예약해둔 귀국 항공편이 갑자기 취소된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황망한 가운데 부랴부랴 서둘러 다행히 대체 항공편을 잡을 수 있었다. 떠나는 날 미안하게도 그를 배웅해주지 못했다. 코로나로 어린이집이 문을 닫아 집에서 손자친구를 돌봐야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함께 한국어를 가르치는 다른 선생님들이 작은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미얀마에서 그는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그들 부부의 새로운 출발에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산다는 일.. 2020. 4. 23.
내가 읽은 쉬운 시 153 - 정끝별의 「첫눈」 올해 첫눈이 내렸다. 눈이 내렸다고 했지만 허공에 반짝이는 흰 비늘 몇 조각만 보았을 뿐이다. 그나마도 땅에 닿자마자, 아니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린 듯 흔적도 없어졌다. 오후에 아내와 양재시민의 숲을 걸었다. 단풍은 거의 지고 눈은 쌓이지 않은 초겨울의 숲은 적요로웠다. 우리들이 나누는 목소리 사이로 우리가 내딛는 발자국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최근에 텔레비젼에서 아프리카에 사는 치타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본 적이 있다. 동물 중에서 가장 빠르게 달린다는 치타의 사냥 성공율은 겨우(?) 20%라고 한다. 다섯 번에 네 번은 심장이 터질 듯한 전속력으로 달려도 실패를 하는 것이다. 실패와 거기에 따르는 허탈은 일상의 대부분일 터이다. 하지만 그의 생존은 20%의 성공에 달려 있다. 거기에 새끼.. 2019. 12. 4.
가지가 담을 넘을 때 넘어야 할 담이 부쩍 많이 생겨난 것 같은 요즈음. 그 굳건한 담들과 나 자신과 주변을 생각해 봅니다. 나의 존재와 그들의 존재가 필연적인 어떤 '도반'적인 관계라고는하지만 삶을 위해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이 땅에 살기 위해 증오해야 할 것은 증오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 2014.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