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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6

안녕들 하십니까 아침 인사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세상이 기우뚱거린다 이 불안한 나라에서 안녕한 게 죄스러워 얼굴 가리고 우는 아침 - 정희성, 「안녕들 하십니까」 - 바다는 8월24일부터 더 이상 신비와 경외가 아니라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림 속 거센 물결을 생명을 잃어가는 바다가 보여주는 단말마(斷末摩)의 몸짓과 비명으로 읽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림 속 사내처럼 그런 바다의 몸짓 앞에 다시는 허리를 꼿꼿이 세울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를 두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믿거나 말하는 자는 핵 오염수를 바다에 쓸어 넣거나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부역자들 뿐이다. 우리는 안녕한가? 안녕함을 보장받고 있는가? 자문(自問)은 그들을 향한 분노로 이어진다. 나의 카누는 뭐지?-내 재산. 나의 신은.. 2023. 8. 27.
봄을 세우는 날 입춘이랍니다. 왜 '들 입(入)'이 아니라 '설 입(立)'을 쓰는 것인지 입춘 때마다 생각하면서도 알지 못합니다. 저절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봄을 세우라는 뜻일까 마음대로 짐작해 봅니다. 내일은 보름 전날이기도 해서 아침에 이런저런 보름나물을 꺼내보았습니다. 작년까진 아내가 많은 종류의 나물을 준비했습니다만 올해는 집에 있는 서너 가지만 가지고 내가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오곡밥도 사곡밥으로 축소 조정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냥 좀 신명이 나지 않는 봄의 문 앞입니다. 또 내일은 이태원참사 100일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내어 아내와 함께 미사에 참석해 봐야겠습니다. 저 나무가 수상하다 '아름다운 그대가 있어 세상에 봄이 왔다' 나는 이 글귀를 한겨울 광장에서 보았다 스멀스멀 고목 같은 내 몸.. 2023. 2. 3.
병실에서 10 맛없는 병원밥. 설혹 진수성찬이라도 병원밥이란 게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의 노점상 꼬치보다 못하겠지만, 단체 급식임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그냥 맛이 없다. 입원 초기 이틀인가 먹다가 포기하고 직접 해 먹기로 했다. 다행히 집이 가까워 후다닥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정하면 가능했다. 단조로운 병원 생활에서 그나마 우리의 의지를 반영할 수 있는 일과다.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집에 다녀오는 길에 어느 덧 선선해진 기온을 느낀다. 정신없이 보낸 며칠 사이에 가을이 불쑥 와버린 것 같다. 음식과 함께 이 바깥공기도 아내에게 퍼 나르고 싶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 잔고가 빈 통장처럼 또한 얼마나 쓸쓸한가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 2022. 8. 26.
내가 읽은 쉬운 시 146 - 정희성의「너를 부르마」 조국 법무부 장관이 '결국' 사퇴를 했다. 왜 오늘이었을까 하는 사퇴의 시점에 대한 배경이나 과정에 대해선 아는 게 없으나 그에게 더 버텨달라고 주문한다면 너무 혹독하고 잔인할 것도 같다. 정치공학에 앞서 사표 발표까지 따라온 젊은 세대에 대한 그의 사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가 우리 시대의 유일한 '은수저'이거나 '은수저의 대표'라도 된다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은수저'이기나 한 것일까? 그 문제만 가지고도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자들은 거만스레 고개를 쳐들고 있는데······. 그의 지나친 겸손이 애잔하다. 법무부장관이기에 앞서 개인 조국 씨에게 그가 견디고 있는 아픔에 위로를 보내고 싶다. 조국의 사퇴와 상관없이 검찰개혁은 진행되어야 한다는 원칙론이 위안이 되기엔 그의 등장에서 사퇴까지 우리 .. 2019. 10. 15.
내가 읽은 쉬운 시 62 - 정희성의「불망기(不忘記)」 삼일절. '세 번도 더 부정'하고픈 해묵은 현실 속에 우리들의 꿈은 여전히 '압핀에 꽂혀'있다. 내일엔 또 다른 내일의 파도가 오겠지만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외치는 일이다. 만세! 만세! 만세! 내 조국은 식민지 일찍이 이방인이 지배하던 땅에 태어나 지금은 옛 전우가 다스리는 나라 나는 주인이 아니다 어쩌다 아비가 물려준 남루와 목숨뿐 나의 잠은 불편하다 나는 안다 우리들 잠 속의 포르말린 냄새를 잠들 수 없는 내 친구들의 죽음을 죽음 속의 꿈을 그런데 꿈에는 압핀이 꽂혀 있다 그렇다, 조국은 우리에게 노예를 가르쳤다 꿈의 노예를, 나는 안다 이 엄청난 신화를 뼈가 배반한 살, 살이 배반한 뼈를 뼈와 살 사이 이질적인 꿈 꿈의 전쟁, 그런데 우리는 갇혀 있다 신화와 현실의 어중간 포르말린 냄새나는 꿈속 .. 2017. 3. 2.
내가 읽은 쉬운 시 34 - 정희성의「진달래」 텔레비젼 드라마 「송곳」의 주인공이 말했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고. 그 말은 뒤집어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풍경이 변하지 않았다면 서있는 곳은 여전히 같은 것이라고. 45년이나 흐른 '전태일의 늦가을'에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시,「진달래」를 읽는 이유가 되겠다. 바스라질 듯 낡은 시집의 책장을 다시 조심스레 넘겨가며. 잘 탄다, 진아 불 가운데 서늘히 누워 너는 타고 너를 태운 불길이 진달래 핀다 너는 죽고 죽어서 마침내 살아 있는 이 산천 사랑으로 타고 함성으로 타고 마침내 마침내 탈 것으로 탄다 네 죽음은 천지에 때아닌 봄을 몰고 와 너를 묻은 흙가슴에 진달래 탄다 잘 탄다, 진아 너를 보면 불현듯 내 가슴 석유 먹은 진달래 탄다 '7080'의 감성이 그다지 상투적으로 .. 2015.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