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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경험도 늙는다

by 장돌뱅이. 2020. 9. 7.


영화 『인턴』의 주인공 
벤 BEN은 70세의 은퇴한 노인이다. 영화 도입부에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저는 은퇴했고 (···)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그로 인해 제게 많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은퇴는 여전히 진행 중이기도 하죠. 전 항상 창조적으로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요.
처음엔 은퇴라는 새로움을 즐겼습니다. 뭔가 해야 할 일을 뒷전으로 둔 채 땡땡이를 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만.
그동안 모은 마일리지를 모두 쓰며 전 세계를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어디를 여행했건 집에 오자마자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걸 해결하기 위해선 계속해서 움직여야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을 나서선 어디든 갔죠. 어디든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715분엔 스타벅스로 향했어요.
(
중요한 얘기를 나눌 일 없는 익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그곳에서)
설명하긴 어렵지만 마치 어딘가에 속해있는 듯한 느낌도들었습니다. 
나머지 시간엔 뭘 하냐고요? 전부요. 골프, 독서, 영화, 카드놀이, 요가, 요리 교실, 화초 재배에 중국어도 배우고요.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봤죠. 물론 생각보다 자우 장례식장에도 가게 됩니다.  
요즘 유일한 여행은 샌디에이고에 있는 아들 집에 가는 거죠. 너무 좋아요. 저는 그들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제가 필요 이상으로 그들에게 의지하는 것 같아요. 오해하진 마세요. 저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 반대죠. 난 그저 내 삶의 빈 구멍을 깨닫고 있고 그것을 채우고 싶을 뿐입니다. 그것도 빨리요."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몇 해 전 33년 간의 직장 생활을 끝낸 뒤  '드디어' 백수가 되었을 때 나도 비슷했다. 
'정말 회사에 안 가도 될까?', '거래처의 이메일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뭔가 해야 할 일을 뒷전으로 둔 채 땡땡이를 치는 듯한 터무니 없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33년 만이 아니라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50여 년 동안 눈을 뜨면 할 일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그런 관성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겠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라지만 견딜 수 있다면 그런 자유를 포함하여
백수는 
갑자기 확장된 백지장 같은 시간을 무엇이든 부단히 채워 넣어야 한다.
백수 초기엔 출근 시간과 비슷한 시간에 집을 나서 도서관으로 향하곤 했다. 
일상의 내용은 달라졌지만 패턴은 비슷하게 가져가기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터였다.
도서관을 택한 건 그동안 미뤄두었던 책을 실컷 읽어보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독서와 함께 다른 일도 영화  『인턴』 속  백수 벤과 비슷하게 치루어낸 것 같다.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고 영화를 보고, 요리 교실에 등록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외국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맞벌이 부부인 딸아이네를 위하여 매주 '손자
저하(손자친구)'를 보러 다녔다.
해외영업이 맡은 직무였기에 직장 생활 내내 외국인들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외국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는 생각으로 '한국어교원 양성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벤은 마트에 다녀오던 길에 우연히 발견한 소식지에서 시니어 인턴 사원 모집 공고를 발견한다.  
그리고 평생 동안 회사를 다닌 자신의 성실함과 신뢰도 그리고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내세워 합격을 하게 된다.


EXPERIENCE NEVER GETS OLD?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벤은 회사의 모든 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업무는 물론, 지위고하를 막론한 직원들의 개인적인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문제에까지
오랜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의 지혜는 화려하게 부활을 한다.
다소 상투적이긴 하지만.

문제는
지금의 현실 세상이 해묵은 연륜에서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편리한 'GOOGLE 신'의 지혜에 의지하게 되면서 경험의 용도 폐기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앞당겨져 온 것이다. 
초산의 젊은 딸이 아이 키우는 방법을 엄마나 할머니의 경험에 묻거나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잘 키우는 이유다.
손자아이도 머지 않아 옛날 딸아이가 물었던 '부레옥잠이 물에 뜨는 이유' 같은 질문을 내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 때는 말이야'는 꼰대의 전용어가 된 지 오래고,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무지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 앞선 글 참조 : https://jangdolbange.tistory.com/1943 )
속된 말로 간단히 표현하자면 나이 먹은 게 장땡인 시절은 지나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빠른 속도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이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다.
사회가 고령의 세대들에 대해 고민해 주는 것은 고맙고 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불편해질 때가 있다.
고령의 세대를 마치 정신적 성장을 멈춘 고집불통의 '꼰대'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사회적 부담감을 계량화 하여
공동체 발전의 걸림돌일 뿐인 소비적·잉여적 존재로만 바라보는 듯한 시각을 대할 때 그렇다
.
(앞선 글 참조 : https://jangdolbange.tistory.com/213 )

특별한 개인은 있을 수 있겠지만 해묵은 세대가  새로운 세대 보다 더 우월하거나 근본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도
허황돼 보인다. 
그것은 외형적 젊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만큼 왜곡된 것이다인간은 태어나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50+'
는 '50-'의 퇴적물이거나 '50-'와 대립되는 비교열등의 존재가 아니라 총체적인 생의 연장선에 있는
동일하고 동시에 독립된 존재이다생의 어느 지점을 지나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정직하게 대면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모습만이 나이에 상관없이 찬란한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시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대에서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사르트르가 말했던가?
은퇴 후 여러 강의를 듣고  50+ 관련한 이런저런 활동을 했다. 강의는 제2의 삶을 위한 든든한 밑천이 되었다기 보다는
그냥 '강의 소비' 행위에 지나지 않은 것 같고, 활동은 생산적인 '인생 선택'이라기 보다는 무료한 하루의 소일거리인 것도 같다.
그래도 실망하진 않으려 한다.
늙으나 젊으나 고민과 씨름하며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침판은 바늘이 자리를 잡으려고 흔들릴 때만 믿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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