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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입춘 무렵

by 장돌뱅이. 2022. 2. 6.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 박형진, 「입춘 단상」-


손자 친구와 나눈 수수께끼.
"더울수록 옷을 많이 입고 추우면 옷을 벗는 것은?"
"나무!" 

강추위와 바늘끝 바람에 나무들이  옷을 벗고 맨몸으로 서있다. 
온갖 장식을 털어버리고 오직 명징한 정신의 고갱이로만 겨울을 견디겠다는 의지를
보는 것 같다.
아직 실감이 나진 않지만 입춘이 지났으니 머지않아 가지마다 다시
연두색 새싹이 돋고 꽃은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다.

어둠과 추위에 함몰될 때 우리는 패배주의에 갇히기 쉽고, 밝음과 따뜻함에만 끌릴 때
쾌락주의에 빠지기 쉽
다.
입춘은 겨울 다음의 봄을 순차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엄혹한 겨울 속에서도
새싹의 기운을 감지하라는,
이윽고 밀어닥칠 봄날의 한가운데에서도 '천원짜리
한 장 없이 보낸' 지난겨울을 기억하라는, 경계와 긴장의 잠언인지도 모른다.


한결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의 입춘 공기를 심호흡하며 아내와 '무료히' 산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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