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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병실에서 9

by 장돌뱅이. 2022. 8. 24.


이야기 하나,

"호텔만 가야 호캉스인가? 우리도 호캉스(Hospital + Vacance)를 즐기는 중이야"
아내와 함께 웃었다.

이야기 둘,
간호사는 약을 주거나 혈압을 잴 때마다 침대에 붙은 이름표와 팔목에 찬 아이디 팔찌를 스캔하고 말로도 묻는다.
"곱단이요."
아내가 대답하면 간호사는 재차 확인하고 약을 준다.
다른 환자의 약을 잘못 투여하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생긴 바람직한 절차인 것 같다.
내가 약간의 불만스러운 투를 가장하여 간호사에게 물었다.
"이름이 잘못되었는데 왜 안 바꿔주지요?"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
내가 말했다.
"예, 아내 원래 이름이 송혜교거든요."
간호사가 웃었다. 아내는 나의 실없음에 눈을 흘기며 따라 웃었다.
"아쉬운 대로 손예진도 괜찮구요. 제가 현빈과 닮았으니까."

이야기 셋,
딸아이네가 궁금해할까 아내의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렸다.
이를 본 사위가 모범 댓글을 달았다.
"많이 수척해지신 거 같네요. 얼른 건강을 되찾으시길."
내가 답글을 보냈다.
"사진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여전히 기운차고 성깔 있고 치밀하게(?) 나를 가스라이팅 하는 조강지처 본연의 기상은 여전해."
딸아이의 답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였다.

병원은 이제까지 알아온 어떤 지식이나 경험이 필요 없게 되는 곳이다. 오직 주치의 판단과 말만이 유효하다. 회진과 회진 사이에도 시간은 흐른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곳에 갈무리해둘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잠시 실없는 이야기로라도 웃음을 불러보는 일이다. 병실 밖 일상에서도 그렇다. 거창하고 결정적인 담론이 아닌 작고 시시한 이야기로, 살며 부대끼는 순간들을 토닥이고 아내와 야트막한 사랑을 오래 이어가고 싶다.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언덕 위의 사랑 아니라
태산준령 고매한 사랑 아니라
갸우듬한 어깨 서로의 키를 재며
경계도 없이 이웃하며 사는 사람들
웃음으로 넉넉한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의 사랑 아니라
개운하게 쏟아지는 장대비 사랑 아니라
야트막한 산등성이
여린 풀잎을 적시며 내리는 이슬비
온 마음을 휘감되 아무것도 휘감은 적 없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이제 마를 대로 마른 뼈
그 옆에 갸우뚱 고개를 들고 선 참나리
꿀 좀 핥을까 기웃대는 일벌
한오큼 얻은 꿀로 얼굴 한번 훔치고
하늘로 날아가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가슴이 뛸 만큼 다 뛰어서
짱둥어 한마리 등허리도 넘기 힘들어
개펄로 에돌아 서해 긴 포구를 잦아드는 밀물
마침내 한 바다를 이루는

- 강형철, 「야트막한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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