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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추억의 독서 8

by 장돌뱅이. 2022. 10. 3.

9. 맬컴 엑스


70년대 말 창작과 비평사에서 『말콤 엑스 』가 출판되었다.  소설『뿌리』로, 책은 물론 TV 드라마까지 공전의 히트를 친 작가 알레스 헤일리가 말콤(맬컴) 엑스의 구술을 소설적으로 정리 한  자서전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말콤 엑스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알렉스 헤일리의 명성,  창작과 비평사와 번역가(김종철, 이종욱, 정연주)에 대한 신뢰, 그리고 맬컴 엑스라는 특이한 이름에 대한 호기심으로 『말콤 엑스 』를 읽게 되었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흑인민권운동의 대표이자 상징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유일했다. 물론 킹 목사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사항만 알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맬컴 엑스 보다는 많이 알았다(들었다).

맬컴은 생전에 흑인 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있어서 절대로 킹목사에 떨어지는 인물이 아니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 시사 잡지 <라이프>(90년 가을호)가 선정한"20세기 가장 중요한 미국인 1백 명" 중에는 마틴 루터 킹과 맬컴 엑스가 나란히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1986년 레이건 대통령 시절 연방 의회는 1월 셋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이란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공식적으로 미국 사회가 킹 목사를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같은 반열에 올린 것이다. 워싱턴 D.C.에는 그의 기념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 이전 글 : [가족여행기/미국] - 워싱턴 DC 단상2 - 마틴 루터 킹목사 )

 

워싱턴 DC 단상2 - 마틴 루터 킹목사

벚꽃축제는 봄철 워싱턴 DC의 가장 유명한 행사이다. 티달 베이슨 TIDAL BASIN 둘레길을 따라선 오래된 벚꽃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벚꽃이 진 후였지만 잎이 무성한 나무와 호수의 물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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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도 그의 기념관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기념관

그러나 회사 일로 미국 생활 7년 동안 살면서도 맬컴 엑스에 대한 기념일이나  기념 공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나의 과문(寡聞) 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맬컴 엑스가 미국에 끼친 영향이 킹 목사에 버금간다면서도 왜 미국의 주류 사회는 맬컴의 삶을 킹 목사와 같이 대우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그의 흑인운동 방식에 백인사회가 느끼는 두려움과 반감 때문일까?

킹목사와 맬컴은 똑같이 인종의 완전한 평등이라는 목표를 추구했지만 선택한 방법은 달랐다. 두 사람은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다른 경험'을 했으며 '다른 학습' 과정을 거쳤고 '다른 기질'을 지녔으며 '다른 감정'을 느끼고 살았다. 킹 목사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방식을 쓰려고 노력한 반면 맬컴은 흑인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흑인을 조직하는 데 집중했다. 맬컴은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일부 백인의 지지를 위선으로 여겼고 흑인민권운동 지지자들을 백인에게 빌붙는 배신자로 여겼다. (···) 킹목사는 소수의 인종주의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백인과 흑인에게 지지와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맬컴은 소수의 흑인 동조자를 제외한 모든 미국인에게 비판과 저주를 받았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

 맬컴 엑스는 흑인 운동의 기본 노선과 목표의 설정에 있어서 킹목사보다 근본적인 입장이었고 그의 메시지는 매우 충격적이었고 격렬하기까지 했다. 킹목사가  "백인이 당신 집을 부순다고 해도 그들을 사랑합시다"라고 외치며 백인의 양심을 일깨우고,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유머로 소통과 공감의 폭을 넓히면서  비폭력운동으로 흑인의 참정권을 실현하려고 할 때, 맬컴 엑스는 미국 사회를 백인우월주의라는 불치병에 걸린 사회로 규정하고 흑백통합 대신에  미국 흑인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백인에게서 완전 분리(독립)를 하려는 운동을 펼쳤다.

맬컴은 백인 노예 소유주가 지어준 본래의 성 '리틀'을 버리고 뿌리를 확인할 수 없는 노예의 후손이라는 의미를 담은 미지수 X를 성으로 썼다. 또 "흑인에 대한 테러가 있는 곳엔 흑인 무장 게릴라를 보내 보복하겠다"고 공언을 하기도 했다.

언론이  왜 흑인지상주의와 백인을 향한 증오를 가르치느냐고 물었을 때 맬컴은 대답했다.

"노예였던 우리 선조들이 이른바 '흑백통합'을 주장했다면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흑백분리'를 주장하자 증오를 가르치는 파시스트라고 비난한다. 백인이 흑인에게 나를 증오하느냐고 묻는 것은 강간범이 강간당하는 사람에게, 또는 늑대가 양에게 나를 증오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백인은 다른 사람의 증오를 비난할 도덕적 자격이 없다."

맬컴은 모든 타협적이거나 중도적인 흑인민권운동을 부정했다. 그것은 흑인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지연을 초래하며 해결의 지연은 해결이 아니라고 했다. 그  때문에 같은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들로부터도 그는 백인 인종주의자와 똑같은 주장을 하면서 폭력을 선동한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맬컴은 분리separation과 격리segregation은 다르다고 받아쳤다. '격리'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제하는 것이지만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흑인이 백인에게 종속되어 있으면 언제나 일자리와 의식주를 구걸해야 하며 백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흑인의 생활을 규제하고 격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래서 '흑인의 능력 향상'과 미국 내부의 '흑인 공동체형성'을 과제로 제시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

맬컴은 백인 테러에 아버지를 잃은 뒤 구두닦이·양아치·절도·강도·마약밀매·뚜쟁이·도박꾼으로 전전하다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이력은 언론이 그에게 인종주의자·폭력배·파시스트·안티크리스트·공산주의자 등의 혐의를  씌우기 쉽게 만들었다. 하지만 맬컴은 감옥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이슬람교도가 되고 엄청난 양의 책을 읽으며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위치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출소 후 흑인이슬람운동·아프리카민족주의를 거치며 매우 선동적이고 급진적인 흑인운동을 이끌던 그는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 단결기구(OAAU)'를 창설 이후로는 미국 흑인 문제를 제3세계 민중의 문제로까지 확대 인식하였다. 1965년 2월 18일 생전 마지막 연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흑인의 항거를 단순히 백인에 대항하는 흑인의 인종적 갈등으로서 또는 순전히 미국적인 문제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전역에 걸쳐 압박자에 대한 피압박자의, 착취자에 대한 피착취자의 봉기를 보고 있다. (···) 서양의 산업국가들은 고의적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흑인을 예속시켜 왔다. 이 국제적인 범죄자들은 그들의 공장을 살찌우기 위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강간했다. 아프라키 전역에 현저한 현상인 낮은 생활수준은 그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맬컴은 그의 넓어지고 깊어진 생각을  충분히 정밀하게 구체화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1965년 2월 21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OAAU행사에서 괴한들이 쏜 총탄에 희생되고 말았다.

맬컴은 악역이었다. 대중의 사랑과 존경을 얻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흑인의 정체성을 깨우쳐 미국 흑인의 '자기혐오'를 깨뜨리려 했다. "검은색이 아름답다"거나 ''흑인이어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무슬림의 시선으로  외부에서 기독교와 백인교회의 인종주의를 폭로하고 공격했다. 극단적인 비난을 받으면서도 추악한 현실을 드러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세상의 밑바닥에서 자기 발로 걸어 나와 불의한 세상과 맞선 용감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폭력투쟁을 옹호하는 듯한 말을 했지만 실제로 폭력을 조직하거나 행사하지는 않았다. 맬컴은 대학가의 인기 강연자였지만 신랄하고 공격적으로 흑백분리를 주장한 탓에 킹 목사와 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흑인의 자주적 사고방식을 일깨우고 북돋운 점에서는 킹 목사를 능가했다 맬컴은 미국 흑인에게 '정체성의 자각'을 가져다줬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


『말콤 엑스 자서전』은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로 끝난다.

사회는 때때로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이바지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어떤 빛을 가져오고 죽을 수 있다면, 미국이라는 몸에서 악성이 되어버린 인종주의의 암을 박멸하는데 이바지할 어떤 뜻깊은 진리를 드러내고 죽을 수 있다면 ― 그때 모든 공로는 알라에게 돌려져야 한다. 오직 과오만이 나의 것이다. 

미국 화가 EDWARD BIBERMAN의 그림 「I HAD A DREAM」,(LA 카운티 미술관)

맬컴이 떠나고 3년 후인 1968년 4월 4일 킹목사 역시 백인에 의해 암살되었다.

미국의 인종차별제도는 없어졌지만 차별은 남아 있다. 수백 년 이어진 흑백차별이 초래한 소득과 부의 불평등도 여전하다. 중간소득을 기준으로 보면 흑인의 연간 소득은 백인의 절반을 겨우 넘는다. (···) 백인 가구의 재산 중간값은 흑인과 히스패닉 가구의 열 배나 된다. 토지·건물·주식·예금 등 재산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은 백인의 나라임이 분명하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

차별은 남아 있다. 반드시 경제적인 기준이 아니라고 해도 미국은 백인의 나라이다. LA카운티 미술관의 그림 제목처럼 맬컴과 킹목사의 꿈은 과거형(HAD)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그렇지 않다면 로드킹이나 트레이본이나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설명하기 힘들다.

 

짐머맨 재판

요사이 미국은 짐머맨 재판 결과의 여파로 시끌벅적하다. 작년 2월26일 동네 자율 방범대원이었던 히스패닉계 백인인 조지 짐머맨은 플로리다 샌퍼드 시에서 흑인 청소년(당시 17세) 트레이본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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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 참조 : 2013.07.21 - 짐머맨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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