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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15년 전 그날

by 장돌뱅이. 2024. 1. 20.

서울의 아파트 단지는 누군가 살다 쫓겨나간 자리라는 말이 있다.
단지 개발이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시키는 '합법적'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개발이 가져올 막대한 이익을 공유하는 재개발조합과 건설사 토호 세력으로 이루어진 카르텔은 견고하고, 이들이 휘두르는 폭력은 종종 법과 권력의 비호를 받아 왔다.

2009년 1월20일 용산의 남일당 건물 옥상에선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른바 '뉴타운사업'의 개발은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만 동의 여부를 물었고 그곳에서 삶을 영위해온 69퍼센트에 달하는 세입자들에겐 묻지 않았다.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사람들은 철거에 저항을 했고 폭력에 시달리다가 망루에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무리한 진압작전이라는 비판을 받은 경찰은 아무도 기소되지 않은 반면 철거민들은 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경찰 총 책임자는 도의적 책임을 진다며 자진 사퇴한 후 오사카 총영사, 한국공항공사 사장, 국회의원을 거쳐 지금의 여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작년 11월엔 '용산참사'를 "도심 테러와 같은 심각한 폭력 시위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43층의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오늘은 참사가 일어난지 15년이 되는 날이다.

*이전 글 참조 :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정운찬 새 총리가 용산참사유족들을 방문했다고 한다. 사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이MB정권으로서는 늦은 행보이지만 신임 총리로서는 당연히 우선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방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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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두 개의 문"과 "미드나잇인파리"

지난 초여름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첫 번째 영화 “두 개의 문”은 2009년 1월에 발생한 ‘용산참사’에 대한 기록영화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 비극에 대한 내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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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발끝부터 화형당하던
그날
가난한 이들의 비명소리조차 진압당하던
그날
통곡도 절규도 경악도 수갑에 채워지던
그날
다섯 명의 전태일이 다시 한꺼번에 불태워지던
그날
전남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이 다시 옥상으로 내몰리던
그날
누군가가 다시 고문당하고 의문사 당하던
그날
중앙정보부 안가 7층에서 최종길이 다시 내던져지던
그날
신민당사 옥상에서 김경숙이 다시 뛰어내리던
그날
신흥정밀옥상으로 내몰린 박영진의 몸에 다시 불길이 타오르던
그날
안양병원 옥상에서 다시 박창수가 내던져지던
그날
부정투표함을 지키던 구로구청 옥상에서 다시 사람들이 뛰어내리던
그날
접근금지의 비무장지대에서
천만 비정규직들이 이천 이백만 노동자 가족들이
오백만 도시빈민들이 이백만 청년실업자들이 백만 이주노동자들이
오십만 장애인들이 다시 길 잃은 난민으로, 국외자로 몰리던

그날
재벌들의 앞날이 환해지던
그날
모든 금수저 특권층 대주주 가족들의 저녁이 풍성해지던
그날
고위 관료들의 미래가 더욱 안전해지던
그날
부패한 정치인들의 차기 차차기가 밝게 점쳐지던
그날
진압책임자가 학살책임자의 총애를 받아
일본총영사로 인천공항공사 사장으로
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등극하던
그날

그날들을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어디에선가 불태워지는 가난한 자들의 절망을
오늘도 어디에선가 생의 주소지를 잃고 헤매는 이들의 막막함을
오늘도 헬조선의 비애를 숙명처럼 살아가야 하는
모든 흙수저 N포세대 인생들의 가녀린 소망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모든 생의 아픔 곁에서
오늘도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갈 곳 잃고 서성이는
다섯 철거민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철거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저들의 무한한 독점과 탐욕이라는 것을
진압당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저들 소수의 권력과 특권이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언젠가는 꼭 이루고 말리라 약속하며
눈물로 떠나 왔던 남일당 건물 위 파란 망루를
다른 꿈을 꾸는 이들의 작은 꼬뮌이었던 레아를
작은 광주였던 그곳을
작은 1987이었던 그곳을
작은 7.8.9였던 그곳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곳에 남겨두고 온 나의 약속을
잊을 수가 없다

- 송경동,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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