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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영화 <<저스트 머시>>

by 장돌뱅이. 2024. 2. 23.

1986년 앨라배마에서 18살의 백인 여성이 살해되었다.
다음 해 가난한 벌목공 월터 맥밀란이 범인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증거는 없었고 한 백인 범죄자의 증언만 있었다. 그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많은 흑인의 증언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결국 그가 범인이 된 이유는 '딱 보면 범인인지 알 수 있다'는 백인 경찰과 검찰의 신통술 때문이었고, 그보다 앞서 그가 단지 흑인이기 때문이었다.

기록을 검토한 인권 변호사 브라이언은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기 위해  차별과 심지어 살해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헌신적인 노력을 다 한다. 그리고  1993년 마침내 앨라바마 주 대법원의 재심을 이끌어낸다.

재판과 청문회에서 브라이언이 한 발언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실감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넷플릭스로 집에서 보니 세부 대사를 옮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번 사건을 한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 하는 것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흑인 남성을 재판 1년 전부터 사형수 수감소에 수감하고 배심원에서 흑인을 제외한 사실과 기소의 근거를 백인 중범죄자의 강제적인 증언에 의존하고 법을 준수하는 흑인 증인 스무 명의 증언을 무시한 사실. 그의 무죄를 입증하는 모든 증거를 숨기고 사실을 말하려는 모든 사람을 위협한 사실을 본다면 이 사건은 단순한 한 피고인의 재판 그 이상이 됩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공포와 분노로 통치될지 아니면 법의 원칙으로 통치될 지에 대한 시험대가 됩니다.
본 법정 뒤에 서 있는 사람(흑인)들이 기소될 때 모두 유죄로 추정된다면, 여기에서 나가 바로 이런 일이 자시들에게 일어날까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우리가 그냥 가난하고 결백한 것보다 부유하고 유죄일 때 더 나은 대우를 받는 체제를 인정한다면, 정의가 구현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에 따라 평등한 정의를 구현하고 재산, 인종, 또는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권리를 보호한다고 말하려면 월터 맥밀리안과 그의 가족의 이 악몽을 끝내야 합니다. 맥밀리안에 대한 혐의는 편견으로 가득한 절박한 사람들이 진실은 무시하는 대신 쉬운 해결책을 찾은 허위 기소로 입증되었고. 그건 법이 아닙니다. 그건 정의가 아닙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전 원대한 계획을 갖고 법대를 졸업했습니다. 세상을 바꿀 생각으로요. 하지만 맥밀리안이 우리의 생각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줬습니다.마음 속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사람은 저에게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쳐줬습니다. 이제 희망을 잃는 건 정의의 적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희망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진실을 왜곡할 때도 말입니다.
우리에게 앉으라고 할 때 일어나게 해줍니다. 조용히 하라고 할 때 말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 각자는 우리가 저지른 죄악의 일보다 더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걸 배웠습니다.

영화 속 문제의 발단이었던 보안관의 지위는 월터 맥밀리안의 무죄 판결로 어떤 영향받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에 따르면 오히려 그는 그 사건 이후에도 보안관에 6번이나 재선되었고  2019년에 은퇴했다. 한 개인의 무죄 판결이란 제비 한 마리가 미국 사회의 해묵은 인종 차별에 봄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세상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

브라이언의 발언 중에 "가난의 반대는 부가 아니라 정의"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 시인의 초탈이나 '단지 불편함' 아니라 그 자체로 제거해야 할 사회적 '죄악'이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 사회의 법이 (고 노회찬 의원의 말대로) '만인에게가 아니라 부유한 만 명에게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브라이언은 "우리의 체제가 이 무고한(가난한) 사람에게서 돌려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빼앗았다고 말했다.

자갈밭에 노동으로 쓴 네 이름이다
밥술에 치떨리는 네 자존심이다
단칸방에 잠든 네 청춘이다
물지게를 지고 맞서던 네 하늘이다
고무신이 찢겨 울던 네 역사다
바람에 쫓겨가는 네 무명옷이다
보릿고개 노여움의 네 샛길이다
어머니가 쓰다듬던 네 솥뚜껑이다
벌판에 고꾸라진 네 무덤이다
장터에 소리치는 네 꿈이다
아이들의 웃음에 박힌 네 허무다
뱃머리 잡고 쓰러진 네 절망이다
군화가 짓밟은 네 앞가슴이다

- 노영희,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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