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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대보름 쇠기

by 장돌뱅이. 2024. 2. 25.

지신밟기의 흥겨운 풍물 가락, 달집 태우기,연의 줄을 끊어 액운과 함께 날려보내기, 이웃마을과 돌싸움, 더위팔기, 아홉가지 나물을 아홉 번 먹기, 부럼 같은 다채로운 행사와 놀이, 이야기가 대보름이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일은 못으로 깡통에 많은 구멍을 뚫어 불을 피워 돌리는 쥐불놀이였다. 일 년 중 유일하게 허락받은 보름 전날인 상자일(上子日) 저녁의 불장난. 

이제 풍물은 아파트에서 사라졌고, 달집 태우기나 쥐불놀이는 텔레비전 뉴스에서나 만나게 된다.
더위팔기는 시시해졌다. 아침에 잠에서 깬 손자친구 1호에게 내 더위를 팔 수 없어 이름을 부르고  '니 더위 나한테 줘라' 했더니 무슨 장난인가 싶어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내력을 설명해 줘도 별 재미없다는 무관심의 표정을 지었다. 설날에서 보름까지만 날리던 연은 이제  강변에 나가면 사시사철 볼 수 있다.
남은 보름 풍속은  나물과 부럼이다. 

"간단하게 몇 가지라도  만들어 보름을 쇠야지."
딸아이 집에 손자저하들을 돌보러 오면서 아내는 오곡밥 재료와 작년 내내 준비한 마른 나물 중에서 몇 가지를 챙겨 짐 속에 넣었다. '간단한 몇 가지'라고 했지만 하루종일 걸려 불리고 볶거나 끓여야 했다.
하지만  손자저하들은 반기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붉은 색의 밥도 의심쩍어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굳이 팥을 골라내란다. 

위 사진은 보름 전날 저녁 아내의 상차림이고 아래 사진은 딸아이가 같은 음식으로 보름날에 차림 점심상이다. 같은 음식이지만 어떻게 플레이팅을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으로 보인다.
젊은 딸아이 감각의 판정승!   

부럼의 땅콩만은 손자저하들도 까는 것 재미있어했다. 앞으로는 만들기에 수고스럽고 맛도 밋밋한 나물도 점차 사라지고 보름 풍속으론 부럼만 남지 않을까 예상해 보얐다.

딸아이는 보름나물과 나물로 만든 비빔밥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 유명 식당에서 전주비빔밥을 먹은 후 한동안 외식은 무조건 비빔밥만을 고집해서 아내와 나를 질리게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두 아이를 둔 맞벌이 젊은 주부로서 보름나물 같은 명절 음식을 느긋하게 마련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1호와 그보다 어린 2호가 혼자서 혹은 합작으로 만드는 요란, 시끌벅적을 조율하고, 서둘러 밥을 먹이고 옷을 입혀 학교로, 어린이집으로 보내는 것만으로도 시간에 쫓겨야 하는, 그야말로 '전투 육아'가 일상이기 때문이다.

어제 손자들의 아웅다웅,난리법썩을 지켜보다 딸아이가 말했다.

"예전에 영화 <<나홀로 집에>>에서 실수로 아이를 떼어놓고 여행을 간다는 것은 억지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저런 아이들이 케빈네만 다섯이고 거기에 사촌들까지 가세했으니 부모가 혼이 빠지지 않았을까?"

나는 그 말에 동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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