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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행복한 영화보기 15. - 주먹이 운다

by 장돌뱅이. 2005. 5. 13.


내게 한 친구가 있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그는 회사로부터 갑작스런 ‘명예퇴직’을 통고 받았다.
(‘명예퇴직’ 이란 단어를 누가 만들었을까? 꼭 조롱하는 느낌이 든다.)
그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집요하게 연습에 열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아직 자신있다.”
나는 그 때 그의 말이 마라톤에 대한 자신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에 대한 자신인지 묻지 않았다.

얼마 전엔 한 프로야구단 선수들이 성적이 부진하자 삭발을 했다.

명예퇴직과 달리기.
야구 성적과 삭발.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관계가 없다.

영화 속에서
한 때는 나라를 대표한 권투선수였지만
사업은 실패하고 부인과 아이마저 떠나 버려 삶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한 사내는 중년의 나이에 권투신인왕전에 도전한다.
그리고 희망한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서있을 수만 있다면...”

약한 사람들에게 ‘삥’이나 뜯던 한 젊은 불량배는
‘한 건’을 저지르다 감옥에 갇힌다.
그 사이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는 사고로 세상을 뜨고
홀로 남아 돌보아 줄 사람 없는 할머니는 치매로 자리에 눕는다.
더 이상 더 내려갈 수 없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그도
권투글러브를 끼고 프로신인왕전에 도전하여
앞에서 설명한 중년의 권투선수와 일전을 치른다.

친구의 마라톤과 야구선수의 삭발이 그렇듯
권투시합의 승리가 그들에게 현실에서의 승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기진해질 때까지 달리기를 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깎고
피가 튀는 주먹 앞에 자신을 내몬다.
견고한 현실의 벽 앞에
나아갈 수는 없더라도
끝까지 서 있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악착같은 버팅김.
그것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
영화는 쉽게 답도 전망도 주지 않지만,
우리는 최소한 그것을 삶으로 이해한다.

(200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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