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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6

서리풀공원 걷기 아내와 서리풀공원을 걸었다. 코로나에 밀려 매번 집 근처 한강 주변만 걷다가 모처럼 먼(?) 길을 나선 것이다. 대중교통도 오래간만에 이용해 보았다. 강남 성모병원 옆길로 공원에 들어 방배역 쪽으로 빠져나왔다. 아내에게 보조를 맞춰 쉬엄쉬엄 천천히 걸으니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예상했던 대로 산철쭉은 만개의 절정을 지나 끝물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미루다 일주일 정도 늦게 공원을 찾은 탓이다. 연초록의 잎들이 성긴 꽃잎 사이로 고개를 디밀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라진 것들에 연연하기보단 눈과 마음을 열어 지금 주어진 것들을 즐기며 살 일이다. 계절은 우리의 선택적 기호와 상관없이 매 순간마다 어떤 절정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는가. 공원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이름만으로 들끓.. 2021. 4. 30.
브런치 브런치(BRUNCH)는 아침(BREAKFAST)과 점심(LUNCH)의 합성어다. 규범 표기는 아니지만 우리말로는 '아점'(아침 겸 점심)쯤 되겠다. 요즈음이야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일상 용어가 되었지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하던 옛날 농경 사회나 잔업, 철야, 특근으로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돌던 경제 개발 시기에는 결코 생활 속에 들어올 수 없는 단어이고 먼 서양의 문화였을 뿐이다. 아침과 점심 사이에 아점은 없고, 대신에 새참만 있었을 것이다. 직장에 다닐 때 브런치는 주말 아침에야 유효한 단어였다. 한껏 자고나서도 느릿느릿 게으름을 피우다 산책을 나가 가까운 카페에서 아내와 커피와 음식 - 프랜치 토스트, 에그 베네딕트,.. 2021. 4. 29.
미나리와 영화『미나리』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셔요 병아리 떼 뿅뿅뿅뿅 놀다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앙증맞게 종종걸음 치는 노란 병아리 떼와 파란 미나리 싹의 이미지가 봄과 잘 어울린다. 어린아이가 병아리 떼가 놀던 자리에서 엄마를 급하게 부르는 듯한 노래도 예쁘다. (다만 병아리는 집밖 미나리꽝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한다. '조금 커야 울타리를 비집고 나가 집 근처 텃밭을 다니지 병아리 스스로는 절대 그렇게 할 줄 모르고 엄마 닭도 애기들을 데리고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미나리꽝"에 대하여 "미나리를 심는 논"이라고 설명한다. "땅이 걸고 물이 많이 괴는 곳이 좋다"라고 덧말도 붙여 놓았다. 어떤 단어에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미나리 .. 2021. 4. 25.
영화 『더 포스트(THE POST)』 1971년 6월 뉴욕타임스는 미국 펜타곤의 비밀문서를 폭로한다. 문서는 베트남 전쟁에 정식으로 개입하기 이전부터 미국이 저지른 음모와 조작, 은폐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닉슨 행정부는 타임스의 기사가 국방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며 기소를 했고 법원은 추가 보도 금지 명령을 내린다. 우여곡절 끝에 한발 늦게 비밀문서를 입수한 워싱톤 포스트는 후속 보도를 이어갔고 정치권력과 첨예하게 대립을 하게 된다.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더 포스트』는 이런 상황 속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 전말을 다룬다. 열정이 넘치는 편집장인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와 보도가 몰고 올 파장을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의 모습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이성을 상실한 거대 국가권력의 음모와 압.. 2021. 4. 23.
분짜와 느억맘 분짜(Bún chả )는 가는 면발의 쌀국수인 '분'과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 경단인 '짜'를 합친 말이다. 이 두 가지를 느억맘 소스에 적셔 채소(파파야 )와 함께 먹는다. 베트남 북부지방의 대중적인 음식으로 보통 점심에 많이 먹는다고 한다. 느억맘(nước mắm)은 베트남의 전통 생선 젓국으로 우리나라의 멸치액젓과 비슷하다. 태국의 "남플라", 캄보디아의 "턱트레이", 라오스의 "남빠", 미얀마의 "응아삐" 등도 같은 종류다. 베트남 음식에서 느억맘의 사용 범위는 넓다. 볶음밥이나 쌀국수는 물론 고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음식에 사용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들은 느억맘의 냄새를 두고 '송장 냄새'라거나 '지옥의 냄새'라고 부르며 코를 내눌렀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멸치 액젓이 그렇듯이 느억맘은 음.. 2021. 4. 21.
세월은 흐른다 피터팬, 후크, 팅커벨, 웬디······ 어릴 적 만화와 책에서 친근해진 이름이다. 90년 대 초 인도네시아에 살 적에 그 이름의 주인공들을 영화『후크』에서 만났다. 당시에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어린 딸아이와 함께 자카르타의 한 극장에서였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뒤 같은 영화를 이번엔 손자친구와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손자친구는 제 엄마가 어린 시절 깔깔대며 웃던 바로 그 장면에서 똑같이 웃었다. 다른 점은 딸아이가 피터팬과 팅커벨을 좋아했다면 손자친구는 조금 무서워하면서도 이상하게 악당인 후크선장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시계소리를 무서워하는 후크선장의 접근을 막아줄 것이라 자신하면서, 한 손으로 눈을 가려 애꾸를 만들고 다른 손은 갈고리처럼 구부려 후크 선장을 흉내내기도 한다. 이.. 2021. 4. 18.
꽃훈장 내린 서울숲 오래간만에 서울숲을 걸었다. 어느새 연녹을 지나 초록으로 향하는 숲길을 천천히 걷는데 별안간 눈 앞이 초롱불로 현란해졌다. 만개한 색색의 튤립이었다. 지난 토요일 자전거를 타다 중랑천변에 가득한 튤립을 보고 조만간 아내와 다시 가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뜻밖에 가까운 곳에서 그곳보다 더 많은 튤립을 보게 된 것이다. 횡재를 한 기분으로 아내와 꽃 사이를 걸어 다녔다. 사진을 찍어 딸아이에게 보냈다. 이내 '우와!'하는 감탄이 돌아왔다. 화려한 튤립의 잔치를 보며 미국에 살 적, 4월이면 아내와 가곤하던 칼스바드를 떠올렸다. 그곳도 지금쯤 여기처럼 형형색색의 긴 꽃 이랑이 언덕을 넘어가며 화사한 햇볕 속에 몽환적인 봄의 절정을 만들고 있으리라. ( 이전 글 참조 : Flower Field ) 꽃은 훈.. 2021. 4. 16.
비 오는 하루 비가 오는 날은 같은 음악과 커피를 듣거나 마셔도 맑은 날과는 느낌과 맛이 다르다. 혹은 보통 때와는 다른 분위기의 음악과 다른 맛의 커피를 찾기도 한다. 아내는 날이 우중충하면 평소에는 즐겨하지 않는 '달달이(케이크이나 쿠키)'를 궁금해 한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눅진한 감촉과 낮은 채도와 명도의 풍경이 만드는 분위기에 사람의 감정도 젖어들기 때문일까? 집안에 머물기 힘들게 만드는 화창한 날씨만큼 부산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듯 가끔씩 내리는 비가 싫지 않은 이유다. 근래에 들어 가끔씩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잔다. 젊은 날에는 없던 일이다. 딸아이 결혼 전까진 맑으면 맑은 날씨를, 비가 오면 비를, 심지어 태풍이 오면 태풍을 이유로 아내와 딸에게 나들이를 종용하곤 했었다.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 아니냐며 .. 2021. 4. 13.
나란히 가지 않아도 아침에 따릉이를 빌려 타고 강변을 따라 명동으로 달렸다. 함께 한국어를 공부하는 미얀마 친구들이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러 온다고 해서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개나리와 벚꽃이 지는가 싶더니 철쭉이며 난데없는 튤립까지 봄꽃의 행진이 화려하다. 사람이 가꾼 것이라 해서 아름다움이 덜 하지 않았다. 날씨까지 화창하니 자전거 타기에 더없이 좋았다. 명동에선 피켓을 든 십여 명이 한 조로 일정 시간마다 교대를 해가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코로나로 거리를 유지하다보니 일인 시위에 가까웠고 시위라기보다는 애절한 호소였고 하소연이었다. 그 대열 속에 전날 밤 12시까지 야간 작업을 한 피곤함도 접어둔 채 두 시간 가까이 전철을 타고 온 미얀마 친구가 보였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가 있.. 2021.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