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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435

청담대교 몇해 전 울산에 살다가 18년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청담대교가 청담동으로 이어지는 줄 알고 출근 길에 들어선 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청담동은 자꾸 멀어지고 결국 멀리 수서로 돌아서 출근해야 했습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이름을 수서대교나 뚝섬대교로 짓지 왜 청담대교인지? 그것도 강남 선호라는 세태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출근길 내내 혼자서 궁시렁거렸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밤에 보는 청담대교는 아름답습니다. 언젠가 한강을 따라 걸으며 다른 한강다리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지가 벌써 오래전인데 아직 실행에 옮겨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3 .6) 2012. 5. 9.
제주행4 - 지독한 사랑 두 가지 - 이중섭 발가락군을 사랑한 아고리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화가 이중섭은 지독한 가난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져야 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헤어진 부부는 다시는 만나지 못 한 채 안타깝게 편지만 주고받았다. 편지에서 이중섭은 아내 마사코를 발가락군이라고 불렀다. 연애시절 이중섭이 발가락을 다친 마사코를 치료해주면서 발가락이 예쁘다고 붙인 애칭이다. 아내는 이중섭의 턱이 길다고 아고리라고 불렀다. 일본말 아고는 턱이고 리는 이중섭의 성이었다. *위 사진 :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살던 방과 집 그들은 한국전쟁 시절 서귀포에서 일 년 가까이 지냈다. 서귀포 언덕 위 초가집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꼭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 2012. 5. 9.
제주행3 - 지독한 사랑 두 가지 - 김영갑 김영갑. 죽을 만큼 제주도를 사랑한 사람. 일생을 두고 제주도에 전율한 사람. 한라산이 제주도고 제주도가 한라산이듯 그가 제주도고 한라산인 사람. 나는 무엇에 그토록 절실해본 적이 있던가. *위 사진 : 생전의 김영갑(두모악갤러리 팜플렛에서 재촬영) 두모악갤러리에 걸려있는 시인 정희성의 글을 옮겨본다. " ---------------------------------------------- 어머니 젖가슴 같은 오름과 소리쳐 울 때가 더 아름다운 제주 바다를 처음 만나곤 열병을 앓았다. 지독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소름 끼치는 그리움 때문에, 샛살림 하듯 오가는 것으론 갈증만 더 할 뿐이어서 서울살이를 접고 아예 제주에 둥지를 틀었다. 1982년부터 3년 동안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제주사진을 찍던 끝에 내린 .. 2012. 5. 9.
충주 월악산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 정상에서 본 능선과 준봉들. 안개 속에 깨어나는 아침 산들이 마치 동양화를 보는 듯 하다. (2005.8) 2012. 5. 8.
제주행2 - 작아지는 섭지코지 작아지는 섭지코지 ================= 밤새 바람이 드세게 불었다. 바람소리만으론 태풍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제주에서는 바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라지만 비까지 몰아치니 계획했던 다랑쉬오름은 포기를 해야 했다. 올레길을 걷는 것도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 바람을 따라 비가 우산 밑으로 들어오는 터라 장시간 걷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위 사진 : 비바람이 몰아친 덕에 일정 조정이 불가피했다. 대안으로 김영갑갤러리와 이중섭미술관을 목표로 잡았다. 가는 길에 잠시 신양리에 있는 섭지코지에 들려보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언덕으로 오르는 동안에 바람은 여전했지만 다행히 비가 멈추어 주었다. *위 사진 : 협자연대 앞에 선 딸아이 섭지코지는 ‘좁은땅’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언덕 끝.. 2012. 5. 8.
제주행1 - 나의 첫 올레길 성산 가는 길 조천 바닷가 축대 위에 연북정(戀北亭)이 있다. 그 옛날 제주로 파견된 관리나 권력 다툼에 밀려난 유배인들이 떠나온 곳과 자신을 내친 권력에 대한 충정과 사랑이 아직 변치 않았음을 시위하던(?) 장소라고 한다. ‘북에서 온’ 그들에게 제주는 어떤 곳이었을까? 변방에 버려진 처지지만 끝내 뼈를 묻고 싶지는 않은 곳? 아름답기는 하지만 척박한 곳? 한양에서 새로운 소식만 뜨면 곧바로 떠나야 할 곳이었을까?. 그래서 수많은 관리들이 이 섬에만 오면 그렇게 유난스러운 폭정으로 백성들을 수탈했던 것일까? 제주도를 “삶과 자연이 한 뭉수리로 얽힌” 현장으로 인식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연북정의 ‘북쪽 사람’들이 묻는 제주의 의미가 아니라 제주도와 그 속에서 살아온 제주 사람들이 묻는 ‘북’의 의미가.. 2012. 5. 8.
연두빛 마곡사 춘마곡(春麻谷)이라 했던가. 계곡과 산언덕에 불꽃놀이를 하듯 터져 나오는 연두빛 새 잎들의 반짝임. 눈부심. 봄이 아름다운 곳이 어디 마곡사 뿐이겠는가마는 계곡을 따라 걸어 마곡사까지 가는 동안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동안 아내와 내게 세상은 온통 연두빛 마곡사뿐이었다. 계절은 변함없이 제 때에 예상할 수 있는 모습으로 오고가면서도 늘 새로운 감동과 경외스러움을 남긴다. 이 봄도 마곡사도 그랬다. 햇살도 따사롭게 감겨왔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도대체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2007.04) 2012. 4. 20.
춘향(春香) 그리고 광한루.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오ㅅ날, 처음 만나든 날 우리 둘이서 그늘밑에 서있든 그 무성하고 푸르른 나무같이 늘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길 땅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 하늘을 구름으로 날드래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쏘내기되야 퍼부을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서있을거예요! - 서정주의 시, 「춘향유문 春香遺文」- 아내와 함께 남원의 광한루와 오작교를 춘향과 이도령의 마음으로(?) 걸어보았습니다. (2007.04) 2012. 4. 20.
월드컵공원의 행복한 기억과 산책 *위 사진 : 월드컵 경기장에 전시된 사진 중에서. 2002년 6월 우리 모두는 행복했다. 누구나 그날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세월이 지났어도 그날의 승리와 함성을 담은 사진과 그림 역시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원래는 아내와 함께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을 산책하러 나선 길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왔을때 즐거운 기억의 현장인 월드컵경기장을 한바퀴 돌고 싶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월드컵기념관 입구에 서게 되었다. 단돈 1000원에 그날을 더욱 실감나게 회상할 수 있는 기회를 구태여 외면할 필요는 없었다. *위 사진 : 가난한 시절의 축구공, 맨 왼쪽이 돼지오줌보이다. 기념관은 우리나라 월드컵의 도전사와 2002년 월드컵의 상보,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드러낸 축제로서의 응.. 2012.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