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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7

햇살에 일어나 보니 "이 놈의 뉴스 이젠 그만 보자."분노와 개탄 끝에  탄식과 무기력으로  막막해진 감정을 추스르러 눈 내린 강변을 걷다가 돌아와 어쩔 수 없이 다시 TV를 켜니 화면 속에 H.O.T의 노래 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폭설 속에 비닐을 뒤집어쓴 채 노래를 부르고 몸을 흔들며 밤을 새운 젊은이들이었다. 거제도에서 올라왔다는 한 청년은 "이제 젊은이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행동을 해야 할 때"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초등학교 시절 열렬한 H.O.T의 팬으로 '강타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딸아이 덕분에 저절로 알게 된  노래라 나도 몇 소절을 따라 부르다 함부로 내뱉었던 냉소와 절망을 황급히 거둬들여야 했다.새들도 떠나고그대가 한 그루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그.. 2025. 1. 6.
이른 송년회 옛 회사 직원들과 만나 이른 송년회를 했다. 2002년 월드컵 때 청담동 한 카페에서 회식을 하며 대표팀 승리에 광란의 시간을 보내던 기억. 그때는 부장이며 과장이었는데 이젠 각자 회사의 어엿한 대표들이 되어 있었다.   하긴 그게 언제 적인가.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세월 아닌가.긴 인연이다. 나는 내가 세상에 베푼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부터 받고 있는 행운아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다시 한번 그걸 확인하는 시간이었다.자리를 옮겨가며 옛 이야기와 얼마 전 다녀온 여행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를 했다.마음속에 숨겨둔 다른 잇속이나 눈치가 있을 리 없는 투명한 시간이었다.  저 강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면 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텐데 바다로 흘러간다고도 하고 하늘로 간다고도 하지만 시방 듣.. 2024. 10. 9.
디카시 몇 해 전(아마 지금도) 하상욱 시인의 짧은 시가 인기를 끌었다.그의 시는 간결·명료하면서도 우리 생각의 이면이나 약점을 유머러스하게 꼬집었다. 시에 '거룩한' 의미를 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말장난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문학이란 의미나 철학 이전에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의 기발한 시를 읽는 것이 충분히 즐거웠다. 머릿속에서 청량제들이 작은 불꽃처럼 팡팡 터지는 느낌이랄까?일테면, 아래와 같은 시를 읽을 때.고민 하게 돼우리 둘 사이- 「축의금」-바빴다는 건이유였을까핑계였을까- 「헬스장」-매일널 꿈꾸고매일널 외면해- 「퇴사」-그것이 전통적인 의미로는 시가 이니고 '시 비슷한 것'이면 무슨 상관이랴. AI가 시도 써준다는 세상에 기존의 기준으로 새로운 것을 .. 2024. 8. 3.
비에 대한 공부 비 오는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들의 우산을 보면 알록달록 옹기종기 아기자기 귀엽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노래를가 생각나게 한다.왼쪽에 내가오른쪽엔 네가 나란히 걸으며비바람 내리치는 길을좁은 우산 하나로 버티며 갈 때그 길 끝에서내 왼쪽 어깨보다 덜 젖은 네 어깨를 보며다행이라 여길 수 있다면길이 좀 멀었어도 좋았을걸 하면서내 왼쪽 어깨가 더 젖었어도 좋았을걸 하면서젖지 않은 내 가슴 저 안쪽은 오히려 햇살이 짱짱하여그래서 더 미안하기도 하면서- 복효근, 「우산이 좁아서」 -예전에 비를 이렇게 구분한 적이 있다.이슬비 : 아주 가늘게 내리는 비, 는개보다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늘다.보슬비 : 바람이 없는 날, 가늘고 성기게 내리는 비설명 중에 나오는 는개는 기억해두고 싶은 예쁜 우리말이다.는개는 ".. 2024. 7. 11.
모기의 여름 장마와 여름이 시작되었다. 더불어 모기철도 함께 시작되었다. 식구들 중에 유독 모기들에게 인기가(?) 많은 나는 산채길에서든 집에서든 십여 차례 그놈들에게 원치 않는 헌혈을 해야 여름이 지날 것이다.아내는 나와 함께 있으면 모기에 안심한다. 아내에겐 관심이 없고 나에게만 달려들기 때문이다.그럴 때 나는 "봐! 나랑 결혼 잘했지?" 하고 억지 공치사를 해대기도 한다.결혼 전 아내의 별명은 모기였다.'그 모기'는 내게 별 관심이 없어 나만 혼자 애가 닳아 그  주위를 맴돌아야 했다.'맴돌았다'는 것은 순화시킨 표현이고 '껄떡거렸다'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다.그 당시 또 좋아하던 시인 조태일의 「국토」 연작시 1편 제목이 하필 「모기를 생각하며」여서 나는 그것이 무슨 나의 사랑시라도 되는 양 걸핏하면  '모.. 2024. 7. 4.
꽃 아닌 것이 없게 하소서 아내가 다친 상처를 꿰맸던 실밥을 풀었다.늙수그레한 의사는 덤덤한 말투로 '잘 되었다'고 아내를 안심시켜 주었다."축하해!""이게 축하할 일인가?"나의 말에 겸연쩍어하며 아내는 웃었다."오월이니까."나는 괜스레 생뚱맞은 말로 시인 흉내를 내보았다.먼 곳 혹은 특별하거나, 진부한 일상과는 다른 것들에 높은 의미를 부여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완전히 그 미망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때로 무료하기까지 한 일상의 담백한 맛을 깨닫곤 한다.봄이 지나가면서 때맞춰 이런저런 꽃들이 피었다가 사라진다. 목련에 개나리, 진달래와 벚꽃이 피는가 싶더니 철쭉이 피고, 지금은 등나무꽃과 정향나무꽃과 붓꽃과 수국과 해당화와 장미가 피었다. 낯선 곳에서 서성이지 않아도 아파트 화단에, 문화회관 앞에, 산책하는 강변과 호숫가에 산.. 2024. 5. 14.
밥 먹고 영화나 한 편 서먹하니 마주한 식탁 명이나물 한 잎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데 끝이 붙어 있어 또 한 잎이 따라온다 아내의 젓가락이 따라와 떼어준다 저도 무심코 그리했겠지 싸운 것도 잊고 나도 무심코 훈훈해져서 밥 먹고 영화나 한 편 볼까 말할 뻔했다 - 복효근, 「무심코」- 간밤에 아내에게 짜증을 낸 끝에 말다툼을 했다. 부부싸움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 문제로 일어날 리 없으니 사소한 일이 발단이다. 거기에 늘 그렇듯 나의 '밴댕이 소가지'가 더해졌다. 아내와 언쟁은 어차피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1분 화내고 10분 사과하는 미욱함과 비효율을 이번에도 반복했다. 그래도 아내가 사과를 받아주어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온다. 근처 공원길을 걸어볼까 했지만 아직 완전하.. 2023. 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