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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3

꽃 아닌 것이 없게 하소서 아내가 다친 상처를 꿰맸던 실밥을 풀었다.늙수그레한 의사는 덤덤한 말투로 '잘 되었다'고 아내를 안심시켜 주었다."축하해!""이게 축하할 일인가?"나의 말에 겸연쩍어하며 아내는 웃었다."오월이니까."나는 괜스레 생뚱맞은 말로 시인 흉내를 내보았다.먼 곳 혹은 특별하거나, 진부한 일상과는 다른 것들에 높은 의미를 부여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완전히 그 미망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때로 무료하기까지 한 일상의 담백한 맛을 깨닫곤 한다.봄이 지나가면서 때맞춰 이런저런 꽃들이 피었다가 사라진다. 목련에 개나리, 진달래와 벚꽃이 피는가 싶더니 철쭉이 피고, 지금은 등나무꽃과 정향나무꽃과 붓꽃과 수국과 해당화와 장미가 피었다. 낯선 곳에서 서성이지 않아도 아파트 화단에, 문화회관 앞에, 산책하는 강변과 호숫가에 산.. 2024. 5. 14.
밥 먹고 영화나 한 편 서먹하니 마주한 식탁 명이나물 한 잎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데 끝이 붙어 있어 또 한 잎이 따라온다 아내의 젓가락이 따라와 떼어준다 저도 무심코 그리했겠지 싸운 것도 잊고 나도 무심코 훈훈해져서 밥 먹고 영화나 한 편 볼까 말할 뻔했다 - 복효근, 「무심코」- 간밤에 아내에게 짜증을 낸 끝에 말다툼을 했다. 부부싸움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 문제로 일어날 리 없으니 사소한 일이 발단이다. 거기에 늘 그렇듯 나의 '밴댕이 소가지'가 더해졌다. 아내와 언쟁은 어차피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1분 화내고 10분 사과하는 미욱함과 비효율을 이번에도 반복했다. 그래도 아내가 사과를 받아주어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온다. 근처 공원길을 걸어볼까 했지만 아직 완전하.. 2023. 1. 26.
11월의 식탁 하루 한 번 묵주기도를 올리는데 분심(分心)이 가득하다. 중간에 다른 생각을 따라가다 황급히 돌아오지 않고 집중해서 끝내본 적이 거의 없다. "내가 기도를 받는 입장이라면 '야 정신 사납다. 그 따위로 기도할려면 치워라'하고 돌아앉을 것 같다"고 아내에게 이야기 하니 웃는다. 그래서 간단명료하고 짧은 화살기도를 자주 올리기로 했다. "오늘 끓이는 콩나물국이 맛있게 해주세요." "아내와 하는 산책을 무사히 마치게 해주세요." "마트에서 맛있는 귤을 고르게 해주세요." 산만해질 틈이 없어 좋긴 하지만 너무 쪼잔한 것도 같다. 거룩한 것은 그렇듯 단순하다 숟가락 하나 들었다 놓는 일 세상에서 가장 큰 문은 사람의 입 그 문 열고 닫는 열쇠도 숟가락 -복효근, 「숟가락을 위하여」 부분- 시인은 거룩한 것은 단순.. 2020.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