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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5

와 설날이다! 어릴 적 설날은 설빔을 기다렸다가 맛난 음식을 기다렸다가 무엇보다 세뱃돈을 기다리는 날이었다. 세배를 하고 난 뒤 어른들이 손 안에서 만지작거리는 돈의 액수를 조바심치며 가늠해보곤 했다. 이제 내게 설날은 이틀 전에 보았으면서도 '오래간만이네요?'라고 품 안에서 뜻밖의 인사를 건네기도 하는(2호) 손자를 기다리는 날이다. 드디어 띵동! 저하들이 왔다. "누구세요?" 이미 카톡으로 알고 있지만 묻는다. "도둑이에요." 2호저하의 유모어다. 아내와 나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반긴다. "아아니∼! 대감 어쩐 일이시오?" 요새 설빔은 큰 의미가 없다. 아니 설빔이란 게 특별히 없다. 아마 내 어린 시절의 설빔보다 지금 아이들의 평상복이 더 좋을 것이다. 저하들에겐 설빔은 단지 평소와 다른 거추장스러운 옷일지도 .. 2024. 2. 11.
귀성열차 80년대 나는 지방에서 근무하며 명절이면 서울로 올라오는 '역귀성'을 했다. 긴 시간을 이동하여 본가와 처가에 하룻밤씩을 자고 다시 같은 길을 내려와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한 번은 일이 있어 명절에 서울로 오지 못한 적이 있었다. 저녁이 되자 대부분 고향으로 떠나 몇 집만 불이 켜진 텅 빈 지방 도시의 아파트 단지에는 적막함과 괴괴함이 가득했다. 귀성이 없는 3일의 휴가는 길고 여유로웠지만 동시에 우리 가족만 마치 절해고도에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고속도로에 길게 늘어선 차들과 붐비는 기차역 풍경을 연신 보여주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이런저런 짐을 꾸려 바쁘게 오르내리는 명절의 시간에 번거롭고 고단한 이상의, 그렇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위로와 신명 같은, 무엇인가가 있다.. 2024. 2. 9.
고향은 내가 태어난 서울의 맨 동쪽 끝 마을은 특별히 고향이란 의미로 떠오르진 않는다. 어릴 적 마을은 당연히 사라져 버렸고, 사람들도 모두 떠나가 굳이 찾아가 본들 아는 친구 하나 없는 타향이 되었다. 다녔던 초등학교나 중학교가 있지만 거기도 옛 모습은 아니다. 아래 시에서 그리는 고향처럼 오래전 '벗어놓은 외투 같'이, 한 때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지만 '내가 빠져나가' 버린 '후줄근한 중고품 같은 공간.' 썰렁하다. 하지만 상실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특별히 아쉽지도 않다.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 2023. 1. 21.
설날 보내기 설날 오후 딸아이네 집으로 갔다. 1박 2일 동안 손자들과 보냈다. 정확히는 오후 2시부터 이튿날 밤 11시까지였다. 1호는 (유치원 숙제 같은) 해야 할 일을 미리 해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온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고 달달한 말도 덧붙였다. 요즘 들어 부쩍 나를 좋아하기 시작한 2호도 손짓 발짓을 하며 아장아장 걸음으로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1호의 시샘이 워낙 강해 2호에게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2호는 1호와 노는 문밖에서 자기도 끼워달라며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1호가 틈을 주는 아주 드문 시간에만 잠깐씩 놀아줄 수 있었을 뿐이다. * 배경음악 출처 : 브금대통령 / Track : 날아라 슈퍼코기 - https://youtu.be/PZlQXsEP.. 2022. 2. 4.
코로나 시대에 설날 보내기 책과 영화 속 『82년생 김지영』은 친정어머니로 빙의를 해서 시어머니에게 갑자기 속말을 털어놓는다. 시가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다. "사부인도 명절에 딸 보니 반가우시죠? 제 딸도 보내주셔야죠. 시누이 상까지 다 봐주고 보내시니 우리 지영이는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영화와 책 『B급 며느리』속 김진영은 한걸음 더 나간다. 아예 명절(제사였던가?)에 시집에 가지 않는다. '원래 그런 것'이라 거나 '누구나 다 하는 것'이라는 논리에 당당히 맞선다. "시댁 가면 저는 손님입니다. 손님 대접을 해주세요." "제사에 며느리가 꼭 가야 되는 거야? 오빠 할아버지잖아?" "도대체 며느리가 무엇이길래 반대로 시부모님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주고받는 것일까?" "오빠는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 2021.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