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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반스케치4

저물녘 옛 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건강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화제에 오른다. 한때 돌멩이도 소화시켰다던 시절의 과장된 기억을 자주 들먹이다가, 한번 이야기가 터지면 삐걱이는 관절과 침침해진 시력, 흔들리는 이(齒牙), 높은 혈압, 콜레스테롤, 당뇨까지 가히 종합병동에 들어서곤 한다. 건강 푸념이 끝나면 대개 뭐 하며 지내느냐고 묻는 게 순서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친구끼리는 이미 서로의 일상을 잘 알고 있지만 경조사나 송년회 자리에서나 가끔씩 만나는 사이에서는 부담 없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공통된 질문이 된다. 백수가 된 동창들은 은퇴 전만큼이나 다양한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행, 캠핑, 낚시, 등산, 헬스, 마라톤, 서예, 그림, 악기, 연극, 목공예, 봉사, 요리 등등. 쓰임새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2023. 10. 20.
'친구'와 '저하' 사이 코로나라는 이름도 생소한 바이러스가 어느 날 갑자기 엄습했다. 당황과 공포로 세상은 휘청였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괴물체와 싸워야 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걸핏하면 문을 닫았다. 근처 학교에서 감염이 확인되어도 유치원은 지레 놀라 아이들의 등원을 금지했고 학부모들도 그런 결정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 결과 손자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보통 때 같으면 아파트 놀이터에서 미끄럼틀과 그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제법 멀리 있는 파출소와 소방서까지 쏘다니며 보냈겠지만 주로 집에서 머물러야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는 이웃들과도 서로 침묵 속에 야릇한 긴장감을 느끼던 때였다. 하루종일 집에서 보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뽀로로와 타요버스, 로보카 폴리에게만 어린 손자를 돌봐달라고 맡길 수.. 2023. 9. 21.
뗏목을 버린 후에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라.' 부처님의 이 말씀은 다양한 의미와 용도로 인용된다. 60대 중반을 넘긴 나 같은 은퇴 세대에겐 지난 삶의 방식을 털어버리고 이른바 새로운 '인생 이모작'을 시작하라는 경구(警句)로도 자주 쓰인다.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나의 직장 생활도 늘 숫자로 표시되는 목표치에 실적을 맞추려는 안간힘의 시간이었다. 나의 '뗏목'은 그것을 위해 떠돌아다닌 모든 발품과 거래처라는 인맥으로 엮은 것이었다. 강을 건너고 난 후 뒤를 돌아보며 연연해 하진 않았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갔고 거래처도 변함이 없이 존재했다. 뗏목은 저절로 버려졌다. 정년퇴직을 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그냥 밤을 새워 보는 거라고 말하는 영화 속 주인공이 있었다. 왜냐하면 뒷날 피곤할 걸 염려해서 한 번도 시.. 2023. 3. 8.
올해의 '첫' 일들 새해 첫날, 특별히 단호하게 어떤 결심을 세우지 않았다. 도전과 성취의 의지를 다지는 대신에 이전부터 해오고 올해도 변함없이 반복할 자잘한 일상들을 잠시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책 읽기, 음식 만들기, 영화 보기, 걷기, 손자들과 열심히 놀기 그리고 그림 그리기 따위. 1. 첫 책 2023년에 읽은 첫 책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 서울편』이었다. 올해 아내와 함께 궁궐을 포함하여 서울 시내를 돌아볼 때 그의 답사기를 참고할 것 같다. 하지만 이전의 답사기에 비해 작가의 개인적인 인맥담과 소회가 많아지면서 읽는 재미는 덜 했다. 특히 "인사동3"은 인사동 관련한 유명 인사들의 인명을 단순 나열하는 식이어서 저자에게는 친근감 있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2023.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