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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5

봄눈 밤 사이 눈이 많이 내렸다. 아침에 손자저하들과 창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나무가 하얗네." 저하2호가 말했다. 봄기운에 눈이 서둘러 사라질까 염려되어 핸드폰에 몇 장 담아 보았다. 나무가 눈을 뜨면 저 눈은 자취도 없을 것이다. 나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눈. 자기를 깨운 것이 봄바람이거나 봄비거나 봄볕인 줄 알겠지. 나를 깨운 것은 내가 막 눈을 뜬 순간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가 아닐지도 몰라. 오,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나를 바라보다 사라진 이여 이중으로 물거품이 된 알지 못할 것들이여. - 황인숙, 「봄눈 온다」- 저하1호의 등굣길을 함께 하고 오자, 뒤이어 2호가 등원 준비를 하고 있다. 2호는 요즈음 갑자기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린이집 등하원 길에 몇 번씩 반복해서 이야기.. 2024. 2. 22.
덥다 덥다 덥다 이루고, 무너지고, 복구하고 만들고, 먹고, 싸고, 또 만들고 허물어지고, 사라지고, 망각하고 다시 만들고, 먹고, 싸고 하루 햇빛이 일제히 돌아가느라 몰려 있는 하늘 - 황인숙, 「서녘」- '이루고, 만들고, 먹고, 싸고······' 그러느라 지구가 정말 많이 뜨거워졌나 보다. 폭우가 언제였던가 싶은 불가마 더위.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매미는 한밤중까지 비명을 멈추지 않는다. 예전엔 8월 15일이면 바닷물이 차가워져 해수욕장도 문을 닫았던 터라, 지금쯤이면 '올여름 더위도 한 10일 남았네' 하고 말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어림없어 보인다. 오늘 저녁해가 더위도 쓸어안고 서쪽으로 가버렸으면! 하는 상상을 하며 견딜 뿐이다. 2023. 8. 4.
못다한 사랑 지난 수요일 저녁, 디즈니에서 방영하는 최민식 주연의 를 보려고 하는데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이다. 목이 좀 아파서 자가검사를 해보니 두 줄이 나왔고 다행히 다른 가족들은 이상이 없다고 했다. 우리집으로 와서 혼자 격리생활을 하겠다고 하여 아내와 나는 부랴부랴 짐을 싸서 딸아이네로 피신을 떠나야 했다. 손자들은 환호를 했다. 9박 10일의 '코로나 난민'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침이면 큰 손자는 초등학교로 둘째는 어린이집으로 등교를 한다. 오후가 되면 각각 시간을 달리 하여 하교를 한다. 나의 임무는 아침에 손자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데려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노는 일이다. 아내는 간만에 부엌일을 도맡아야 한다. "집에 있으면 손에 물 안 묻히는 공주인데 여기 오면 .. 2023. 3. 18.
걱정 없는 날 퇴원은 했지만 아직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위해 거실로 침대를 옮겨 놓았다. 베란다 창문을 통해 시원한 하늘을 누워서 볼 수 있도록 시야를 가로막는 물건들도 치웠다. 병원의 병실이 '이코노미 클래스'라면 집은 '비즈니스 클래스'라고 아내가 웃었다. 아내의 불운한 사고 뒤 이런저런 잡다한 걱정거리들이 별안간 사라진 듯하다. 오직 한 가지, 아내의 회복으로 집약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까지의 걱정거리들이란 게 별것 아니었단 뜻도 되겠다. 게다가 아내의 회복도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니 사실 걱정이랄 게 없는 셈이다. "내 불꽃은 하늘보기나 걷기일지도 몰라, 나 걷는 거 잘하잖아."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SOUL)』에 나오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주인공은 "그건 목적(불꽃)이 아니라 그냥 사는 거.. 2022. 9. 12.
내가 읽은 쉬운 시 87 - 황인숙의「조깅」 올해 들어 오늘까지 총 1000KM를 달렸다. 연초에 세운 목표 중 유일하게 달성한 일이다. 1000KM 중 10% 정도는 걸었다. 워밍업(쿨다운)이나 컨디션 저하, 아내와 걷기 등의 경우다. 아내와 함께 한 걷기는 난이도를 고려하여 걸은 거리의 1/2만을 기록으로 잡았다. 봄과 초여름의 현격히 저조한 기록은 개인적인 주변의 문제에 기이한 것이다. 문제의 일부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다만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작년까진 겨울철 3달을 빼곤 한강변을 달렸지만 올해부턴 피트니스 센터의 런닝 머신에서 달리게 되었다. 그놈의 (초)미세먼지 때문이다. 먼지를 들이마셔 해로운 것 보다 달려서 얻는 이득이 크다는 (과학적 근거 없는) 나만의 대차대조표를 앞세우며 강변 달리기를 고집하다 결국 물러서고 말았다... 2018.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