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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창작과 비평

by 장돌뱅이. 2023. 5. 4.

1976년 대학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산 잡지는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와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었다. 각각 친구와 선배로부터 소개를 받아서였다. 그 뒤 『뿌리 깊은 나무』는 빠듯한 용돈으로 매달 사기가 힘들어 몇 달 안 가 끊었지만 『창작과 비평』은 그래도 계간지이므로 빠지지 않고 사 보았다. 내친 김에 창간 이래 10년(1966 ∼ 1975) 을 모은 창비 영인본도 과감히 월부로 구매를 했다. 이 비용은 다행히 고등학생 두어 명에게 과외를 가르쳐 충당할 수 있었다.
비록 마지막 몇 달은 집에서 내주었지만.


막 대학에 입학한 내게 창비는 새롭고 다양한 세상이었다. 솔직히 어렵고 생소한 부분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와는 다른 책을 읽는다는 허영심으로 가급적 빼놓지 않고 읽으려 했다. 그 무렵 누군가 내게 영인본 속 1972, 73년, 75년 여름호에 실린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Ⅰ, Ⅱ, Ⅲ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것은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는'  '월남의 하늘 아래' 국군용사들에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연필에 침 발라가며 위문편지를 써온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이 떠지는 것 같은 기쁨도 느껴졌다. 황석영의 중편 「객지」와 「한씨연대기」도 그랬다. 

아무튼 그 뒤로 30여 년간 빠지지 않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 창비를 책장에 꼽다가 2011년부터는 시나브로 사지 않게 되었다. 창비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긴 미국 주재원 생활과 게을러진 나의 독서가 더해진 탓이었다. 한 번 끊은 창비는 이상할 정도로 다시 사게 되지 않았다.
가끔씩 책방이나 도서관에서 표지의 제목을 훑어볼 뿐이었다.

어제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렸다가 실로 오래간만에 창비 봄호를 샀다.
옆에 있던 아내가 ''이게 얼마만의 창비야!" 하며 놀랄 정도였다.
나의 젊은 시절에서 초로의 나이까지 함께 해온 창비는 어느덧  지령(誌齡) 200호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무심한 사이 여기에도 세월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새로 산 창비의 머리글을 읽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우리 사회가 당도한 현실에 대한 자괴감과 엄중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았으나 그간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다는 탄식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고유명사를 붙여 호명하기도 괴로운 바가 있어서 '새' 정부라고 쓰고 보니 그것은 그것대로 참담한 기분이다. 무언가 새로운 점이 있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겪는 전에 없던 괴로움이지 싶다. 이 정부의 부패와 무능과 무책임은 10·29참사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숱한 죽음을 비롯한 물리적 폭력의 고통을 국민들에게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놀랍도록 노골적이고 뻔뻔하다는 점에서 심각한 정신적·감정적 시련이기도 했다. 듣는 귀를 의심할 정도의 거짓말, 눈 뜨고 보기 힘든 엽기적 행태들도 그런 시련의 일부지만, 어쩌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우리의 시련이 되었나 하는 자괴감이 깊다. 미적대는 개혁의 발걸음을 이제야말로 재촉할 시점이었기에 고통의 체감 정도는 한층 배가 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명박정권 초기에는 일말의 실용주의는 있으려나 하는 기대가 잠시나마 있었다. 또 선거결과에 대한 커다란 실망 속에서도 박근혜정권 초기에는 보고 배운 겉치레라도 번드르르하려니 하는 환상이 없지 않았다. 그와 같은 눈곱만큼의 오해난 환상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이 정권의 또 다른 새로움이라면 새로움이다. 1회차 3분 만에 스토리가 다 드러난 드라마처럼 과연 어떻게 되나 두고 보지 않고도 남은 임기가 어떠할지 그려지고도 남는다. 예상되는 온갖 해악과 파탄의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갈 것이 훤하니 울화와 분노만을 자극하는 이 뻔한 막장드라마는 역시 조기종영이 합당한 결말일 것이다. 요컨대 굳이 지지율을 언급하지 않고도 이 정권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판단은 진작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판단이 끝났다 해서 곧장 효력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데 제도가 갖는 완고함이 있지만, 지난 역사가 보여주듯이 민주주의란 어떤 제도의 틀보다 강력하고 유연하기에 이 민의가 구현될 방도는 조만간 찾아지리라 믿는다.

- 머리글, "미래에 관해 알고 있는 것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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