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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433

겨울숲과 봄똥 2월. 아직 겨울은 끝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봄기운도 쉽게 느껴지지 않는 애매한 달이다. 그래도 요며칠은 날이 푸근해서 아내와 오래간만에 서울숲을 걸을 수 있었다. 짙은 갈색의 나무들은 지난 가을에 잎을 떨군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있었다. 겨울숲이 주는 차분한 침잠(沈潛)과 깊은 적요로움이 감미롭게 다가왔다. 화사한 봄과, 싱싱하고 무성한 여름과, 명징하고 화려한 가을이 쌓여 숙성이 되면 그런 겨울숲의 풍요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가끔씩 눈과 얼음이 녹아 말랑말랑한 땅을 만났다. 굳이 피해가며 걷고 싶지 않았다. 앞서간 다른 사람들도 그랬는지 흙에는 여러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내와 하굣길 신발 밑창에 달라붙은 진흙을 나뭇가지로 떼어내던 어린 시절을 기억해내기도 했다. 봄똥은 겨울이 가기 전에, 혹은 겨울을.. 2023. 2. 13.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2 딸아이네와 지난 연말에 갔던 가평 소재 아난티코드에 다시 다녀왔다. 그곳에서 내가 시간을 보내는 일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손자'친구'들과 놀면 되니 단순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손자'저하'들의 다양한 취향을 맞추려니 복잡하다. 더군다나 어린 두 '저하'들의 나이차를 극복할 수 있는 공통의 놀이를 찾는 것과 각각의 전하에게 적절한 시간배분을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종종 '할아버지 쟁탈전'이라고 좋을 상황이 생겨난다.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 손자친구·저하들의 성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나 1미터 이내의 거리유지가 필수다. 텔레토비와 띠띠뽀 덕분에 잠시 커피 마실 짬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아내는 다음부턴 나와 손자 둘만을 위한 방을 따로 얻어야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의 결론이 결국 '.. 2023. 1. 31.
경희궁 예나 지금이나 궁궐은 다른 도시와 가장 크게 구별되는 서울만의 역사이자 특징이다.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서울에 살면서 여러 차례 궁궐을 다녀왔다. 그때그때 이런저런 건물의 배치와 역할 따위를 책과 안내판을 통해 알아보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원을 걷는 것과 같은 산책의 개념이었다. 정작 건물의 이름에 대해 크게 생각해보진 않았다. 올해는 아내와 서울 시내 궁궐을 돌며 현판과 기둥에 붙은 주련(柱聯)을 알아볼 계획을 세웠다. 문화재청이 발행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궁궐은 조선조 문화의 절대적 공간이었다. 그래서 궁궐 건물의 공간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과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유교 이념의 기초가 보편적 이성인 천명에 기초한 덕치주의,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관, .. 2023. 1. 22.
그 교회가 정말 거기 있었을까? 얼마 전 아내와 광화문 지하철역 근처를 걷다가 깜짝 놀랐다. "뭐야? 이게 새문안교회?" 그 자리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낡은 교회는 사라지고 대신에 휴대폰 카메라로는 다 담을 수 없을 크기의 미끈한 현대식 건물이 보도에 바투 붙어 서 있었다. 갑자기 전혀 낯선 공간에 들어온 것 같아 어리둥절했다. 박완서의 소설 제목을 빌려오자면 예전의 '그 교회가 정말 거기 있었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2014년 7월에 옛 건물의 철거를 시작하여 5년 만인 2019년 2월에 새 건물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대학생 때 친구를 따라 이곳 학생들 모임에 잠깐 나갔던 적이 있다.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거침없이 활달하면서도 따뜻한 '젊은 예수', 기꺼이 고난에 다가서던 그의 삶에 관심이.. 2023. 1. 19.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잭 니콜슨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원제는 "As good As It gets"다. 이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도 약간의 부정적인 의미로도 쓸 수 있다. 더 좋을 수 없으니 최고라는 의미도 되고, 별로 좋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선 이 정도가 최고라는 뜻도 된다. 손자친구들과 만남은 언제나 앞선 의미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이다. 딸아이네와 경기도 가평에 있는 "아난티 코드(ANANTI CHORD)"를 다녀왔다. 손자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오목을 두고 보드게임을 했다. 키즈룸에서 거북선을 조립하고 그림을 그렸다. 함성을 지르며 거침없이 질주하는 친구의 킥보드를 숨 가쁘게 쫓아다니기도 했다. 지극히 평범한 시간의 조각들이 특별한 기억의 모자이크를 만들어 주었다. 아내와 제주여.. 2022. 11. 30.
제주 함덕 31(끝) 어제 오드랑 빵집에서 남겨온 빵으로 아침을 하고, 청소를, 짐 정리를, 숙소 주인과 작별을 했다. 다시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았다. 늘 같은 곳에서 바라보아도 보이는 모습은 그때그때 다르다. 오늘은 선명한 외곽선이 드러나 있지만 구름에 가려 아예 보이지 않을 때도 많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선명하건 흐리건 그 모든 모습의 총체가 한라산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생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그런 것처럼 . "한라산아 안녕! 한 달 동안 늘 창밖에 있어주어서 고마워!" 제주도에 올 때 공항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던 아내의 친구 부부가 고맙게도 다시 숙소에서 공항까지 차로 태워 주었다. 그들은 앞으로 2개월 이상을 더 제주에 머무를 예정이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부러운 한편으로 집으로 가는.. 2022. 11. 18.
제주 함덕 30 최규석의 『송곳』은 제주에서 읽은 마지막 만화다. 프랑스계 대형마트 푸르미에서 벌어지는 노동운동에 대해 그렸다. 부당해고에 맞선 직원들의 노조 결성과 저항, -그러나 그 저항은 생경한 구호나 격렬한 투쟁으로 그려져 있지 않다. 누군가의 거룩한 희생도 없다. 다만 '시시한 약자'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짐을 진 채 갈등하고 고민하며 '시시한 강자'들에 맞서 행동한다. 그 디테일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회사의 편도 노조의 편도 아닌 곳에 나의 자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자리를 결정할 권리는 나에게 없었다. 만화 속 한 중간관리자의 고백이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이 급증하던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했던 나에게 실감 나게 다가왔다. 그때 내가 어떤 위치를 선택할 수 있다고.. 2022. 11. 17.
제주 함덕 29 윤태호의 만화 『로망(老妄)스』은 노인들의 일상을 과장되게 표현한 좌충우돌과 걸찍한 성적(性的) 이야기들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24시간 내내 진지하게만 어찌 살랴. 가끔씩은 재미도 북돋으며 살 일이다. 나보다 먼저 읽은 아내는 "어휴, 능글능글 해. 딱 당신이 좋아할 만화네" 하며 도리질을 했다. '한 번은 가볼(해볼)만 하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해도 괜찮은 일이라고 한다. 나도 그 말에 긍정하는 편이다. 하지만 두 번까지는 필요 없고 정말 한 번 정도는 해도 괜찮은 일이 있는 것 같다. 함덕의 고집돌우럭 식당이 내겐 그렇다. 지난번 처음 방문 때 배가 고픈 데다가 오래 기다린 끝이어서인지 정신없이 먹은 식당이어서 제주를 떠나기 전 복습을 해 볼 식당으로 꼽았다. 기다림이 길고 인터넷 예약도 쉽지 .. 2022. 11. 16.
제주 함덕 28 뜨끈한 어묵탕으로 속을 든든히 하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 행선지는 동문시장이지만 가기 전에 삼성혈에 들리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삼성혈 담 너머로 붉게 물든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서울 지인들이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나게 단풍 든 모습을 카톡으로 보내주었지만 제주에서 주로 해변을 따라 움직이는 우리로서는 좀처럼 가을을 느낄 수 없었다. 대부분이 나무들이 변함없이 초록이었다. 그러다 만난 귀한 단풍은 고향 친구처럼 반가웠다. 유홍준 교수도 칭찬한 삼성혈 앞 입구 도로 양편에 잘(?) 생긴 돌하르방 두 기가 있다. 매표소 앞에는 작은 크기의 돌하르방 두 기가 더 있다. 퉁방울 눈에 큼지막한 주먹코, 어울리지 않는 벙거지 모자가 투박해 보이면서도 만날 때마다 친근감이 있다. 삼성혈은 제주도 사람의.. 2022.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