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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1608

아이들을 구하자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둘째저하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숲 속의 작은곰이다 어흥!" 하며 얼굴을 들이민다. 얼굴에 검은 점과 붉은 점이 찍혀있다. 이럴 땐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시늉을 해야 한다. 또 하루의 놀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둘째는 식구들에게 별명을 붙였다.엄마 아빠는 '일핑'이므로 일을 열심히 하고 늦게 늦게 집에 돌아오라고 이른다. '일핑'이란 저하가 즐겨보는 애니메이션  >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을 임의로 변형한 것이다. 할머니는 식사를 준비하는 '얌얌핑'이고 형은 숙제를 해야하므로(그래야 자기가 할아버지와 놀 수 있으므로) '할일핑'이이라고 한다. 나는 저하와 놀아주는(놀아주어야 하는) '놀핑'이다.이 모든 별명에는 할아버지와 가능한 오래 놀겠다는 저하의 의도가 숨어있다.나는 손자.. 2025. 2. 25.
12차 범시민대행진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외로움이 지나쳐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신현림, 「나의 싸움」- 토요일마다 경복궁 앞에 모여 함께 깃발과 응원봉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연사들의 연설을 듣고 난 뒤 다시 구호와 노래를 반복하며 명동 한국은행까지 걷는다. '아내와 나의 싸움'이다.이 집회와 행진의 끝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때가 언제일까? 여전히 낙관은 금물이지만 2017년 촛불의 .. 2025. 2. 23.
잘 뽑자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이 마구간을 돌아보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었다."이곳에서 일을 하다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그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제가 예전에 이 일을 맡아보았는데 말 우리를 만드는 일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처음에 굽은 나무를 쓰면, 이 굽은 나무가 다시 굽은 나무를 원하기 때문에 곧은 나무를 쓰려야 쓸 수가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처음에 곧은 나무를 쓰면, 이 곧은 나무가 다시 곧은 나무를 원하기 때문에 굽은 나무를 쓰려야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이 말을 한 사람은 유명한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에 나오는 관중(管仲)이다. 그는 말(馬)을 가두는 우리를 만드는데 빗대어 나라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한 인재의 등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2025. 2. 22.
들통난 꼼수 여권 만료일이 다가와서 아내와 함께 새로 만들기로 했다. 재발급엔 사진 한 장이 필요했다. 책상 서랍에 보니 여러 가지 지난 사진이 많았다. 증명사진, 여권 사진, 비자용 사진, 명함판 사진, 알 수 없는 크기의 사진 등등.문제는 6개월 이내 촬영되었어야 한다는 여권 갱신 조건에 맞는 사진은 없다는 것이었다.나는 아내에게 그 중에서 크기만 맞는 걸로 아무거나 한 장 골라서 쓰자고 했다."6개월 이내에 찍었다고 하면 되잖아? 무슨 차이가 있겠어?"'모범시민'인 아내는 별로 내켜하지 않아 했다.하지만 세상일은 종종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 않던가.아내는 마지 못해 내 의견에 떠밀려 언제 찍었는지 모를 사진을 들고 구청엘 갔다.여권 담당 공무원은 좀 의심스러워하는 눈치로 사진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2025. 2. 21.
쫄지맙시다 장기를 둘 때 상대방이나 곁에서 구경을 하는 사람 모두가 졌다고 생각하는데, 끝까지 아니라고, 한(漢)이나 초(楚)가 하나 남을 때까지 지지 않았다고 우기는 장기를 '뚱이 장기'라고 한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손가락질하건 말건, 자기 생각만 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뚱이'라고 부르는 데서 비롯되었고,  이 말은 옛 중국사람들이 우리를 얕잡아 불렀던  동이(東夷)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날리면, 대왕고래, 계몽령, 인원, 요원, 의원, 달그림자 등등 입만 열면 '구라'인  '그 X'이야 자기 생사가 걸렸고 또 자신을 닮은 아바타의 'Yuji'도 걸렸으니 오만가지 '뚱이질'을 다하는 것이겠지만 거기에 깃발과 아우성을 보태는 작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얼마 전 광화문역 근처에 나갔다가 마주.. 2025. 2. 20.
아내가 외출한 날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기왕이면 저녁까지 먹고 와. 저녁 준비 안 하게."현관문을 나서는 아내에게 농담을 던졌다.아내가 외출하고 나면 집 안이 갑자기 휑하게 넓어진다.약간의 해방감(?)과 함께 한가하다가 심심해진다.유튜브로 그레고리안성가를 들으며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는다.혼자 있으면 집중이 잘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내가 없으면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유튜브를 끄고 넷플릭스로 돌려도 시들하다. 이럴 때 가장 좋은 일은 걷는 것이다. 집 근처 대학으로 나갔다. 날이 제법 쌀쌀했다.며칠 동안 푸근한 날씨에 찰랑이던 호수 표면엔 다시 살얼음이 잡혀 있었다. 윤슬은 얼음 위에서 반짝였다.졸업이 가까운 모양이다. 방학으로 조용한 교정 곳곳에 축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졸업생들의 사진과 함께 익살스.. 2025. 2. 19.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 떠난이의  옛 사진 앞에 서면 즐거웠거나 아쉬웠던 기억이 모두 아픔으로 치환된다.그럴 때 아픔은 위로나 극복으로 채워야 할 미진한 감정만이 아니다.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늘 새롭게 발현되는 정직한 반성이기도 하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파블로 네루다, 「점(點)」- 2025. 2. 17.
2055년 2055년을 가상현실(VR)로 큰 손자저하와 체험했다.행사장에 가기 전 손자저하가 선택한 식당에서 저하의 선택 메뉴로 밥을 먹었다."2055년? 그땐 우리가 100살이 다 되었을 텐데 살아있기나 하려나?" 아내의 말에 저하가 말했다."왜요? 요즈음 의학이 발달해서 100살도 넘게 산데요."제법 의젓해졌다는 생각도 잠시.아내와 딸아이가 서로 식대를 계산한다고 설왕설래를 하다 딸아이가 나서자 저하가 말했다."할아버지 할머니는 엄마보다 일찍 죽을 것이니까 돈을 빨리 써버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저하들은 가끔씩 자신들의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어서 실소를 하게 만든다.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둘이서 > 영화를 보며 낄낄거린 적이 있다.딸아이가 유치원때 비디오로 보던 영화를 대를 건너 OTT로 보게 되니 기분이 묘하.. 2025. 2. 16.
국가와 법에 관한 책 두 권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와 조국의『조국의 법고전 산책』을 읽었다.유시민의 책은 오래 전에 한 번 읽었지만 내용이야 이미 기억 저 편에 있고, 또 2017년에 새로 고쳐 썼다고 하니 처음 읽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국의 책은 2022년에 출간되어 처음 대하는 것이었다.책을 읽는데 별다른 이유나 목적이 있을리 없는,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남독을 하는 백수의 독서지만 이 책에는 특별히 '시절이 시절이니 만큼'이라는 이유를 붙여도 되겠다.날만 새면 '법 법 법' 하는 뉴스가 홍수인 세상 아닌가.두 책 모두 읽기에 어렵지 않아 책장이 잘 넘어간다. 유시민이야 워낙 간결하고 정확한 단어를 사용해서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주는 글솜씨라 그렇고, 조국의 책은 전문 학술용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강의한 내용을 .. 2025.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