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단상1605 원래 다 사소했어 주말에 날씨가 궂을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오후에는 강수 확률 100%라는 걸 알면서도 우산을 안 가지고 산책을 나갔다.우산 쓰기 싫어하는 건 나의 좋지 않은 오래된 버릇이다.날씨는 흐렸지만 기온은 푸근했다. 얼음이 다 풀린 호수에는 오리들이 경쾌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호수 둘레길을 걷고 나와 도서관으로 갔다.책을 읽다가 토닥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아내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비가 많이 온다며 우산을 들고 도서관으로 오겠다고 했다.장대비가 아니면 비 맞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라 처음엔 그러지 말라고 하다가 중간 지점에서 아내와 만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도서관 밖으로 나오니 안에서 보던 것보다 빗줄기가 제법 거셌다.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우산이여.. 2025. 3. 3. 제13차 범시민대행진 어릴 적 나는 '애국'이란 단어를 막연히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가치나 사랑 같은 거라고 상상했다. 일테면 반공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적군 탱크를 향해서 맨몸으로 돌진하는 육탄 용사의 용기나 적이 던진 수류탄을 끌어안고 산화하여 아군을 보호하는 희생처럼 거룩하거나 거대한 어떤 것.일상에서 '애국적' 감정이라고 내가 느꼈던 것은 킹스컵이나 메르데카 축구대회의 라디오 중계 때 '가슴에 태극 마크도 선명한 우리 선수들 어쩌고저쩌고' 하는 멘트를 들을 때뿐이었다. 조금 더 커서 근로, 납세, 국방, 교육이라는 국민의 4대 의무를 배울 때는 애국도 들어가 5대 의무로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같다.애국. 나라사랑. 좋은 말이다. 누가 거기에 반대할 수 있으랴.그러나 나는 '애국'과 '국가'를 특별.. 2025. 3. 2. 너무도 자명하기에 층층의 바위 절벽이십리 해안을 돌아나가고칠산바다 파도쳐 일렁이는채석강 너럭바위 위에서칠십육년 전 이곳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해산 전수용을 생각한다산낙지 한마리에 소주를 비우며생사로서 있고 없는 것도 아니요성패로써 더하고 덜하는 것도 아니라던당신의 자명했던 의리와여기를 떠난 몇 달 후꽃잎으로 스러진당신의 단호했던 목숨을 생각한다너무도 자명했기에 더욱 단호했던당신의 싸움은망해버린 국가에 대한 만가였던가아니면 미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이었던가예언으로 가는 길은 문득 끊겨험한 절벽을 이루고당신의 의리도 결국 바닷속에깊숙이 잠기고 말았던가납탄과 천보총 몇 자루에 의지해이곳 저곳 끈질긴 게릴라로 떠돌다가우연히 뱃길로 들른 당신의 의병 부대가 잠시 그 아름다움에 취했던비단 무늬 채석강 바위 위에서웅얼거리는 거친 파도 .. 2025. 3. 1. 고맙습니다 밝은 빛이 비쳐드는 식탁 위에 음식이 놓여 있고 노인이 다소곳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빵의 양이나 칼이 놓여 있는 위치로 보아 혹시 맞은편이나 옆에 누군가 있을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왜 그런지 보이지 않는다. 기도를 하고 있어서일까? 혼자여도 크게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 한 마리가 식탁보를 잡아당기며 앙증맞은 생기(生氣)를 일으키려하지만 '기도하는 노파'의 차분한 분위기를 흔들지는 못한다. 기도란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바람 부는 벌판에 서서 내 안에서 들려오는 내 음성을 듣는 것이다 - 이재무, 「기도」-2월이 다 지났다. 하루, 일주일, 한달, 일 년.시간의 한 마디마디를 지날 때마다 올리는 기도.오늘은 어제와 같고, 3월도 2월과 같기를.아내와 맛난 음식 .. 2025. 2. 28. 작심삼일 대전 성심당은 군산 이성당, 대구의 삼송빵집과 함께 지역 명물 빵집이다.요즈음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전국구 상표가 되었지만.사위가 대전 출장을 다녀오면서 성심당 빵을 사왔다.손자들을 포함한 온 식구들이 나누어 먹었다.특히 단맛을 좋아하는 나는 한밤중에 한 개 반을 더 먹었다.반 개는 아내가 먹었다."당신 때문에 나도 먹게 되잖아!"아내는 내 핑계를 댔다.나는 커피까지 마셨다.3월부터는 야식을 하지 않겠다는 작심삼일의 결심을 또 한 번 해보면서.아무일도 없던 듯이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상욱, 「작심삼일」- 2025. 2. 27. 그 단어가 몇 번 나왔을까? 초등학교 시절 월요일 아침마다 있었던 '애국조회'를 기억한다.가장 지루한 것은 교장선생님의 훈화였다. 어린 우리들은 훈화의 '거룩한' 내용보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교장 선생님의 '에······ 또······'의 숫자를 세며 견뎌야 했다.어제 헌재에서 '그 X'의 최후진술이 있었다.애초부터 그의 입에서 어떤 반성이나 사과가 나올 거라고는 티끌만큼의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재판의 마지막이라는 수식어에 끌려 유튜브 중계를 보았다. 짐작을 했으면서도 인내가 많이 필요했다.5분 정도가 지나면서부터는 다른 일을 하면서 귀로만 듣다가 나중엔 귀를 씻고 싶어질 정도였다."거대야당이 ······ 거대야당을······ 거대야당해서······거대야당 때문에······"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어도 술어도 목적어.. 2025. 2. 26. 아이들을 구하자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둘째저하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숲 속의 작은곰이다 어흥!" 하며 얼굴을 들이민다. 얼굴에 검은 점과 붉은 점이 찍혀있다. 이럴 땐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시늉을 해야 한다. 또 하루의 놀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둘째는 식구들에게 별명을 붙였다.엄마 아빠는 '일핑'이므로 일을 열심히 하고 늦게 늦게 집에 돌아오라고 이른다. '일핑'이란 저하가 즐겨보는 애니메이션 >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을 임의로 변형한 것이다. 할머니는 식사를 준비하는 '얌얌핑'이고 형은 숙제를 해야하므로(그래야 자기가 할아버지와 놀 수 있으므로) '할일핑'이이라고 한다. 나는 저하와 놀아주는(놀아주어야 하는) '놀핑'이다.이 모든 별명에는 할아버지와 가능한 오래 놀겠다는 저하의 의도가 숨어있다.나는 손자.. 2025. 2. 25. 12차 범시민대행진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외로움이 지나쳐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신현림, 「나의 싸움」- 토요일마다 경복궁 앞에 모여 함께 깃발과 응원봉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연사들의 연설을 듣고 난 뒤 다시 구호와 노래를 반복하며 명동 한국은행까지 걷는다. '아내와 나의 싸움'이다.이 집회와 행진의 끝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때가 언제일까? 여전히 낙관은 금물이지만 2017년 촛불의 .. 2025. 2. 23. 잘 뽑자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이 마구간을 돌아보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었다."이곳에서 일을 하다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그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제가 예전에 이 일을 맡아보았는데 말 우리를 만드는 일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처음에 굽은 나무를 쓰면, 이 굽은 나무가 다시 굽은 나무를 원하기 때문에 곧은 나무를 쓰려야 쓸 수가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처음에 곧은 나무를 쓰면, 이 곧은 나무가 다시 곧은 나무를 원하기 때문에 굽은 나무를 쓰려야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이 말을 한 사람은 유명한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에 나오는 관중(管仲)이다. 그는 말(馬)을 가두는 우리를 만드는데 빗대어 나라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한 인재의 등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2025. 2. 22. 이전 1 ··· 5 6 7 8 9 10 11 ··· 17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