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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1602

봄 봄 봄 봄 봄이 왔어요 밤 비행기를 타고 여행에서 돌아와 몸이 피곤한 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헌법재판소의 재판정을 비추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11시 22분.123일의, 아니 지난 2년 반 동안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환호성을 지르고 산책을 나갔다.여행을 다녀오는 일주일 사이 봄은 화사한 꽃으로 피어나 있었다.비로소 봄이 봄으로 느껴지고, 꽃이 꽃으로 다가왔다.산책길에 만나는 낯선 사람과 머리를 맞대고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나누어도 좋을 것 같은 날이다.여전히 갈 길은 멀고, 앞으로 '내란 잔불'을 진화하는 동안에도 예상치 못한 수만 가지 일들이 또다시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지 모르지만 오늘만큼은 즐거운 노래를 불러도 좋으리라.*출처 : 촛불행동 TV 재편집지난 123일 동안의 추웠던, .. 2025. 4. 5.
지진의 기억 보면 볼수록 고구마 100개를 한입에 넣은 듯한 궁금증과 답답증, 울화병이 더할 것 같아 뉴스 보는 걸 최소화하고 지내다 보니 밤이 늦어서야 동남아의 지진 소식을 알게 되었다. 특히 어제는 딸아이가 갑작스럽게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해서 더욱 뉴스를 볼 틈이 없었다.처음 유튜브에서 방콕의 빌딩 붕괴 장면을 보면서 이게 지금 일어난 일인가 믿어지지 않아 다른 채널로 확인을 해보아야 했다. 채널마다 폭포처럼 물을 쏟아내는 고층 빌딩의 루프탑 수영장과 멈춰 선 지상철과 지하철, 거리에 몰려나온 사람들의 놀란 모습이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한국어를 가르쳤던 미얀마 이주노동자들과 방콕에 살고 있는 지인들에게 당사자와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카톡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모두 괜찮다는 회신이 왔다. 태국, 특히 .. 2025. 3. 29.
이제하의 <모란 동백> 남녘 산불의 기세가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 줄 모른다.안타깝게도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아침부터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미세먼지에 황사도 있을 거라는 예보가 있다.우울한 소식에 꿀꿀한 날씨가 더해져서 기분도 무겁게 가라앉는다.저 구름들이라도 그곳으로 몰려가 한바탕 비를 쏟아부었으면 싶다.아파트 화단에 동백꽃이 마침내 환하게 피어났다. 산책길에 서서 그다지 감흥 없이 시큰둥하게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이제하의 노래 을 들었다. 소설가 시인 화가 작곡가에 가수이기까지 한 이제하는 가히 종합예술인이다. 그는 1997년「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쓴 김영랑과 을 작곡한 조두남을 기려 을 발표했다. 이후 이 노래는 조영남이 으로 제목을 고쳐 부르며 널리 알려졌다.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먼 산에 뻐.. 2025. 3. 27.
한 술만 더 먹어보자 33 손자저하 2호가 감기에 걸렸다. 몸이 아프면 식욕부터 떨어진다.(다행히 손자는 열이 나고 기침을 하면서도 잘 놀고 잘 먹는다.)어릴 적 딸아이는 감기 기운이 있으면 닭죽이 특효였다. 손자저하도 그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바라며 닭죽을 끓였다.감기와 상관없는 1호저하도 삼계탕을 무척 좋아해서 두 저하를 위해 안성맞춤인 음식이다.죽, 이라는 말 속엔아픈 사람 하나 들어 있다참 따뜻한 말죽, 이라는 말 속엔아픈 사람보다 더 아픈죽 만드는 또 한 사람 들어 있다- 문창갑, 「죽」-감기 돌림.저하에게서 시작된 감기가 나에게, 다시 딸아이에게로, 사위에게로 옮겨졌다(고 추정한다). 나는 이제 열과 콧물은 그쳤지만 여전히 잔기침은 남아 있고 딸과 사위는 아직 정점을 향하고 있다.나는 누가 더 저하를 밀착경호를 하며 모셨.. 2025. 3. 26.
'냉담자'의 망상 얼마 전 알고 지내는 수녀님께서 동료 수녀님이 광화문역을 지나다가 극우 개신교 집회 참석자들에게 이유 없는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며 우리에게 토요일 "범시민대행진"에 나갈 때 조심하라고 하셨다.아내와 나도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그 집회의 언저리를 지나가 본 적이 있다.사람들이 모일 때 만들어지는 자연스런 신명이나 나지막한 종교적  경건함 대신에 저주와 원망의 아우성만 귀에 가득 들려왔다. 아내와 내겐 마치 광신도들의 집회에 들어온 것처럼 혼이 빠질 것 같았다.급기야 나는 수녀님께 불경스런 카톡을 보내기도 했다."예수님부터 탄핵을 하고 싶네요."왜 사람들은 그런 자리로 몰려가는 걸까?정치가 만드는 팍팍한 현실에서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 2025. 3. 25.
환한 등불 놀랍다. 하루 만에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다니!양지바른 화단의 목련이 갑자기 가지마다  꽃을 가득 피웠다. 아내와 꽃그늘에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저기 가지 좀 봐! 여기 꽃 좀 봐!목련나무에서 어른의 호방한 웃음이나 어린아이들의 구슬웃음이 울려 나오는 것 같다.이어 '마음에 켜지는 환한 등불'!꽃이 있어 이 봄이 위안이다. 저렇게 고운 편지 봉투가저렇게 환하게 가득한 꽃핀 목련나무를 본 봄날엔흰 종이에 정성들여 편지를 쓰고 싶다뽀얀 봉투에 편지지를 곱게 넣어발신인 '목련나무우체국'이라고 쓰고 싶다목련꽃봉오리처럼 환한 등불을너의 마음에 켤 수 있으면 좋겠다- 김선우, 「목련나무우체국」- 2025. 3. 24.
봄은 예쁘다 아파트 화단이 온통 봄기운으로 움찔움찔 들썩인다. 양지바른 쪽 바람 없이 따뜻한 곳에 있는 산수유는 벌써 꽃을 만개했고 개나리 목련 동백은 꽃봉오리를 한껏 부풀리고 있다.곧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나오듯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꽃기운에 묻어올 새로운 소식을 기다려 '아침엔 창문의 커튼을 서둘러 걷고 저녁에 더디게 닫아본다.'무슨 약속이나 있는 듯이 날마다 들창에 서서주렴 걷기는 서둘러지고 내리기는 더뎌지네.봄빛은 하마 벌써 산 위 절에 왔건만꽃 밖으로 가는 스님 저 혼자만 모르누나.(日日軒窓似有期   일일헌창사유기  開簾時早下簾遲   개렴시조하렴지  春光正在峯頭寺   춘광정재봉두사  花外歸僧自不知   화외귀승자불지)- 백광훈(1537-1582), 「용문에서 봄을 기다리며(龍門春望)」-소식 보다 먼저 왔어도 .. 2025. 3. 23.
여긴 내 나라니까 월드컵 축구 예선. 약체 오만과 졸전 끝에 비겼다. 축구광인 나로서는 예전 같으면 흥분을 했을 것이다. 남은 경기의 경우의 수를 따져보며 육두문자를 쓰다가 아내의 눈총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무덤덤했다. 그게 뭐 대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지금의 내란 상황이 지속되면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마 그럴 거 같다.축구경기를 보는 동안에도 경기에 온전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치 어릴 적 숙제 안 한 채로 등교할 때나 공부 안 하고 기말고사 보러 가는 것처럼 뭔가 중요한 일을 빼먹거나 미루고 있다는 찌뿌둥한 감정이 앙금처럼 깔려 있었다.이제까지 여행, 손자, 책, 영화, 음식, 산책 등의 일상을 허접한 솜씨로 채워온 이 블로그도 그렇다.지난 10.. 2025. 3. 21.
'연두연두한' 초봄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우물물에 설렁설렁 씻어 아삭 씹는풋풋한 오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옷깃에 쓱쓱 닦아 아사삭 깨물어 먹는시큼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 연두풋자두와 풋살구의 시큼시큼 풋풋한 연두,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풋내가 나는 연두연초록 그늘을 쫙쫙 펴는 버드나무의 연두기지개를 쭉쭉 켜는 느티나무의 연두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누가 뭐래도 푸릇푸릇 초록으로 가는 연두빈집 감나무의 떫은 연두강변 미루나무의 시시껄렁한 연두난 연두가 좋아 늘 내 곁에 두고 싶은 연두,연두색 형광펜 연두색 가방 연두색 팬티연두색 티셔츠 연두색 커튼 연두색 베갯잇난 연두가 좋아 연두색 타월로 박박 밀면내 막막한 꿈도 연둣빛이 될 것 같은 연두시시콜콜, 마냥 즐거워하는 철부지 같은 연두몸 안.. 2025.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