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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435

제주 함덕 2 기온이 뚝 떨어져 쌀쌀하고 바람이 불었다. 하늘은 더할 수 없이 맑아 한라선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새벽녘에야 잠들었을 아내가 깰까 조심스레 문을 닫고 숙소를 나섰다. 초행의 숙소 주변을 눈에 익히고 아내와 오늘 갈 곳 미리 둘러볼 겸 산책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여행에서 아침마다 내가 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이번 여행은 함덕해수욕장만 왕복하며 보낼 수 있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허리로 인한 소박한 바람이었다. 숙소에서 함덕해수욕장에 이르는 도로의 상태를 살피고 소요시간을 체크하며 걸었다. 인터넷을 통하여 대략의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확인을 해보아야 했다. 해수욕장은 멀지 않았다. 편도로 채 10분 남짓 걸렸다. 아내의 걸음으로는 거기에 추가로 10.. 2022. 10. 22.
제주 함덕 1 지난여름 제주도 여행을 위해 예약을 했다. 그 후 아내가 불운한 사고로 허리를 다쳐 취소를 할까 생각했지만 예약금을 날려도 그냥 두기로 했다. 여행까진 2달 정도가 남아 있어 그 시간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아내의 상태는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졌다. 이제는 집안에서 보조기를 벗고 걸을 정도가 되었다. 마침내 담당의사는 한라산 등반을 안 하는 조건으로 흔쾌히 여행을 허락해 주었다. 한라산 등반? 언감생심이다. 숙소 주변을 산책하는 것을 여행의 전부로 삼았다. 아내가 많이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아직은 한 시간 남짓 천천히 산책을 하는 정도라 우선은 제주도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집에서 출발하면 제주도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네다섯 시간을 눕지 못하고 계속 앉거나 서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데 .. 2022. 10. 21.
발왕산과 선자령 해마다 대관령에서 여름을 나는 야니와 아니카 님 부부의 초대로 두 분이 사는 숙소를 방문했다. 서울보다 시원하다는 얘기는 미리 들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에만 갇혀 지내다가 모처럼 찾은 '초록초록'에 둘러싸인 숙소는 시원하고 쾌적했다. 옥수수와 감자떡으로 점심을 하고 케이블카로 발왕산에 올랐다. 며칠 동안 퍼붓던 큰비가 씻어준 덕분에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일망무제의 시야에는 산들이 겹겹이 굽이쳤다. 스카이워크에 오르고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 간다는 주목나무 숲길을 걸었다. 이튿날 아침, 노을이 좋더니 이내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오후부터는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부부는 우리를 선자령 출발 지점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거기서부터 야니님은 우리와 함께 산행을 하고 아니카.. 2022. 8. 16.
한여름 한낮 - 종묘와 그 부근 종묘(宗廟)는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뒤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봉안한 사당이다. 정문인 창엽문(蒼葉門)은 정면 3칸으로 아담하다. 이제까지 단순 출입문으로만 생각했는데 '푸른 잎'이라는 이름을 알고나니 초록 가득한 이 계절과 잘 어울려 보인다. 창엽문을 들어서면 길게 박석이 깔린 길이 펼쳐진다. 길의 가운데는 혼령이 다니는 신로이고 , 오른쪽은 임금이 사용하는 어로(御路), 왼쪽 길은 왕세자가 사용하는 세자로(世子路)이다. "종묘에서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제례의 절차를 암시하고 행위를 지시하는 상징과 암시의 길이다. 즉, 길은 제향을 위한 통로로서 종묘에서 길을 이해하는 것이 제례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종묘를 이해하는 길이 된다." - 한국문화유산 답사회, 『답사.. 2022. 8. 5.
한여름 한낮 - 덕수궁과 그 부근 민어탕은 여름철 음식이다. 민어가 여름에 알을 낳기 때문이다. 봄철 도다리쑥국으로 유명한 을지로 입구에 있는 식당 충무집에서 계절 음식으로 민어탕을 낸다. 외출을 했다가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민어탕을 미끼로 아내를 불러냈다. 민어탕에는 원래 부레, 간 등의 내장이 들어가야 제맛이라고 한다. 충무집 민어탕에는 살덩이만 들어 있다. 그래도 구수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입에 붙는다.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시원한' 민어탕 한 그릇을 하니 한여름 더위가 만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벌써 팔월인데 까짓 더위라고 해봤자 이제 며칠이나 남았겠어?" 자못 호기롭게 아내에게 말해 보았다. 민어의 원래 이름은 면어, 면은 조기 면(鮸)이다. 민어와 조기는 사촌지간이다. 면의 중국식 발음이 민과 가까워서 복잡한 '면' 대신.. 2022. 8. 4.
설악산 일대(끝) 아침에 비가 그치고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행이 함께 움직이지 않고 세 부부가 각각의 계획에 따라 따로 움직이는 날이다. 함께 여행하되 각자의 일정을 넣거나, 각자 여행하면서 전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방식은 오래전 활동했던 한 여행 동호회에서 실행한 적이 있다. 항공권은 공동구매를 하고 여행지의 숙소와 일정은 개인별로 하되 여행 중 몇 번은 전체가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그때는 인원이 10명(?) 이상인가가 되면 항공사와 직접 네고를 하는 것이 가격적으로 이점이 있었다.), 모든 것을 개인이 알아서 하되 비슷한 시기에 같은 여행지를 여행하면서 몇 번의 ('번개') 모임을 갖기도 했다. 개별 여행이 주는 오붓함과 전체 여행이 주는 축제 분위기를 함께 즐기려는 아이디어였다. 아내와 .. 2022. 6. 19.
설악산 일대2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준비한 우비와 우산으로 대비를 하고 출발을 했다. 이슬비여서 빗발은 세지 않았다. 누군가 이슬비와 보슬비의 차이를 물었다. 나중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았다. 이슬비 : 아주 가늘게 내리는 비, 는개보다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늘다. 보슬비 : 바람이 없는 날, 가늘고 성기게 내리는 비 설명 중에 나오는 는개는 기억해두고 싶은 예쁜 우리말이다. 는개는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를 말한다. 안개비는 "빗줄기가 가늘어서 안개처럼 부옇게 보이는 비(무우霧雨)"고, 가랑비(삽우霎雨, 세우細雨)는 이슬비보다 좀 굵고 가늘게 내리는 비다. 그러니까 사전을 기준으로 약한 비부터 적어보면 대략 이렇겠다. 안개비 2022. 6. 18.
설악산 일대1 서울에서 속초까지 장거리 운전을 할 때 그를 옆에 태운 채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려간 것은 잘못이었다 틈틈이 눈을 돌려 북한강과 설악산을 배경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했을 것을 침묵은 결코 미덕이 아닌데 ······ 긴 세월 함께 살면서도 그와 많은 이야기 나누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다 얼굴을 마주 쳐다보거나 별다른 말 주고 받을 필요도 없이 속속들이 서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를 곧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 여름 바닷가에서 물귀신 장난치고 첫눈 내린 날 살금살금 다가가서 눈 한 줌 목덜미에 쑤셔넣고 깔깔대던 순간들이 더 많았어야 한다 하다못해 찌개맛이 너무 싱겁다고 음식 솜씨를 탓하고 월급이 적다고 구박이라도 서로 자주 했어야 한다 괜찮아 워낙 그런거야 언제나 위안의 물기가 어린 .. 2022. 6. 17.
청계천 걷기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가 말했다. "가장 서글픈 사실 중의 하나는, 사람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계속 밥을 먹을 수도 없으며, 또 여덟 시간씩 술을 마실 수도 없으며, 섹스를 할 수도 없지요. 여덟 시간씩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이지요." 내가 여덟 시간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책 읽기와 걷기다. 물론 이 둘도 여덟 시간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할 수는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들기는커녕 즐겁다. 포크너가 말한 일의 범주에 드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어디에 속하건 백수인 나와 .. 2022. 6.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