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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463

제주살이 1 - 바다에 와서야 바다에 와서야 바다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을 향해 열린 그 거대한 눈이 내게 눈을 맞췄다. 눈을 보면 그 속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바다는 읽을 수 없는 푸른 책이었다. 쉼 없이 일렁이는 바다의 가슴에 엎드려 숨을 맞췄다. 바다를 떠나고 나서야 눈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임을 알았다. -채호기 「바다 2」- 내가 바다에 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바다가 나를 보고 있(어왔)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내가 베푼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가 베풂을 받고 살았다.' '내가 위로를 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위로를 받았다.' '내가 가르친 것만 기억했는데 알고 보니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같은. 내가 누리는 일상에 당연히 그러해야 할 어떤 것은 없는지 모른다. 바다처럼 늘 거기에 있어 나를 바라.. 2021. 9. 24.
'초록초록' 광릉숲 광릉숲 혹은 광릉수목원의 정식 명칭은 국립수목원이다. 광릉수목원은 좀 학술적인 것 같고 국립수목원은 관청 느낌이 나서 나는 광릉숲이라는 이름이 친근감이 들어 좋다. 1,124ha에 달하는 방대한 면적의 광릉숲에는 6,752종(광릉숲 자생식물:946종)의 식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서식 동물도 하늘다람쥐, 장수하늘소 등의 20여 종의 천연기념물을 포함 총 4,487종에 달한다. 예전에 광릉 하면 크낙새로 유명했는데 요즘도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내와 연두색과 초록색이 혼재한 숲길을 설렁설렁,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나무마다 붙어있는 이름표를 살펴보면서. 계수나무, 가문비나무, 너도밤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등 이름은 들어봤지만 실제 모습은 몰랐던 나무들을 확인하는 일은 오붓한 즐거움이었다. 계수나무.. 2021. 5. 28.
태릉(泰陵) 걷기 황사경보가 있기 하루 전 태릉을 다녀왔다. 원래 태릉에서 강릉(康陵)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 볼 생각이었는데, 도착해서 보니 그 길은 5월 16일부터 열린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태릉만 돌아볼 수밖에 없었지만 소나무 숲이 장관이어서 충분히 좋았다. 문정왕후의 태릉은 자체는 정자각에서 눈으로만 올려다보고 같은 숲길을 두 번 돌았다. (*이전 태릉 글 참조 : 태릉 - 문정왕후 ) 태릉은 초등학교 시절 소풍의 기억이 있는 곳이다. 학교에서 가까워서 태릉과 동구릉은 여러번 가게 된 소풍지였다. 가깝다고 했지만 십 리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 초등학생으로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그래도 김밥과 찐달걀, 칠성사이다가 든 '니꾸사꾸' 덕분에 힘든 줄 몰랐던 것 같다. 보물찾기나 수건돌리기, 장기자랑, '* 학년 *.. 2021. 5. 8.
서리풀공원 걷기 아내와 서리풀공원을 걸었다. 코로나에 밀려 매번 집 근처 한강 주변만 걷다가 모처럼 먼(?) 길을 나선 것이다. 대중교통도 오래간만에 이용해 보았다. 강남 성모병원 옆길로 공원에 들어 방배역 쪽으로 빠져나왔다. 아내에게 보조를 맞춰 쉬엄쉬엄 천천히 걸으니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예상했던 대로 산철쭉은 만개의 절정을 지나 끝물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미루다 일주일 정도 늦게 공원을 찾은 탓이다. 연초록의 잎들이 성긴 꽃잎 사이로 고개를 디밀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라진 것들에 연연하기보단 눈과 마음을 열어 지금 주어진 것들을 즐기며 살 일이다. 계절은 우리의 선택적 기호와 상관없이 매 순간마다 어떤 절정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는가. 공원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이름만으로 들끓.. 2021. 4. 30.
꽃훈장 내린 서울숲 오래간만에 서울숲을 걸었다. 어느새 연녹을 지나 초록으로 향하는 숲길을 천천히 걷는데 별안간 눈 앞이 초롱불로 현란해졌다. 만개한 색색의 튤립이었다. 지난 토요일 자전거를 타다 중랑천변에 가득한 튤립을 보고 조만간 아내와 다시 가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뜻밖에 가까운 곳에서 그곳보다 더 많은 튤립을 보게 된 것이다. 횡재를 한 기분으로 아내와 꽃 사이를 걸어 다녔다. 사진을 찍어 딸아이에게 보냈다. 이내 '우와!'하는 감탄이 돌아왔다. 화려한 튤립의 잔치를 보며 미국에 살 적, 4월이면 아내와 가곤하던 칼스바드를 떠올렸다. 그곳도 지금쯤 여기처럼 형형색색의 긴 꽃 이랑이 언덕을 넘어가며 화사한 햇볕 속에 몽환적인 봄의 절정을 만들고 있으리라. ( 이전 글 참조 : Flower Field ) 꽃은 훈.. 2021. 4. 16.
"서북면옥"의 슴슴한 맛 우리나라 음식 중에 집에서 만들어 먹기 가장 어려운 음식이 무엇일까?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평양냉면을 꼽는다.심지어 영원히 밖에서 사 먹을 수밖에 없는 음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면과 국물 그리고 몇 가지 고명을 얹은,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는  물냉면 한 그릇이 뭐가 그리 어려울까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재료의 이상적인 조합을 만들어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메밀과 전분의 배합비에 따라 식감과 맛이 달라지는 면을 제대로 만드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은 편이다.  배추김치, 무김치, 쇠고기와 돼지고기, 오이, 배, 삶은 달걀 등의 고명도 마찬가지다. 가장 큰 문제는 국물이다. 평양냉면의 국물은 동치미국물, 돼지고기 국물, 꿩고기 국물, 닭고기 국물, 소고기 국물.. 2021. 3. 28.
눈 내린 서울의 궁궐과 능 조선의 궁궐은 외국의 예에 비해 소박한 편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다. 백성들이 보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화려함이라고나 할까. 그 이유는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한양의 도시 설계와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을 수 있다. 궁원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궁궐 건축에 대한 정도전의 이런 정신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우리 궁구.. 2021. 2. 14.
한강변 100km 걷기 산책은 아내와 나의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산책은 산(살아있는) 책'이라고 했다. 한 발 한 발 구름과 하늘과 바람, 나무와 숲을 느끼며 걷는 것보다 더 나은 배움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산책은 혈액 순환이나 열량 소비를 위한 런닝머신과는 다르게 풍경을 체험하게 한다. 시간과 거리에 구애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자유로움도 그렇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걸어도 느낌은 늘 새롭다. 가끔씩 시간과 거리를 정하고 걷는다. 산책 보다 강도를 조금 높게 잡는다. 걷는 행위에 자극이 되고 목표가 있으니 성취감도 생기기 때문이다. ( https://jangdolbange.tistory.com/1048 ) 추석 전 하루 25km씩 나흘 동안 100km를 걸었다. 1일차 : 동쪽 방향 한강이 흐르는 방향과 반대로.. 2020. 10. 2.
전라도의 절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새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 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2020. 7. 30.